국민의정부 첫 해인 1998년 6월, 한보그룹 전 임원 Y씨는 검찰의 소환 통보를 받았다. 97년 한보사태 때 국정조사와 검찰 수사를 받았던 터라 Y씨는 소환 이유를 몰랐다. 검찰에 출두한 Y씨는 깜짝 놀랐다. 검사가 “스위스 은행에 숨겨둔 돈에 대해 진술하라”고 다그쳤기 때문이다. 그 돈은 한보가 96년 러시아 한 석유회사 주식 27.5%를 2,500만 달러에 산 뒤 97년 11월 5,700만 달러에 되팔고 남은 차액이었다. 한보는 정부에 2,500만 달러에 판 것으로 신고하고 3,200만 달러를 Y씨 명의로 빼돌렸던 것이다.
■검찰은 단서만 잡았을 뿐 어느 은행에, 얼마가 숨겨져 있는지를 몰랐다. 한보의 초기 투자를 돕다가 해고된 영국인 컨설턴트가 앙심을 품고 주영 한국대사관에 제보한 기초적인 내용만 있을 뿐이었다. 당시 스위스 은행들은 고객 비밀을 밝히지 않았고, 한국과 스위스 사이에도 범죄수사 협력관계가 없어 Y씨가 잡아떼면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30대의 젊은 Y씨는 이미 다 파악한 것처럼 행동하는 검사에 넘어가 은닉자금 규모, 은행을 밝히고 이를 모두 인출했다. 이 돈은 모조리 국고에 귀속됐고 Y씨는 외국환관리법 위반으로 실형을 살았다.
■현재 부동산회사 임원인 Y씨는 “당시 그런 식으로 해외에 자금을 빼돌린 경우가 적지 않았다”면서 “그 돈을 국내에 들여오거나 재투자할 때 유령회사, 펀드, 무역을 통한 돈세탁이 이루어지게 된다”고 말했다. 최근 몇 년 동안 국내 증시에 들어온 외국인 뭉칫돈 중 상당수가 세탁된 해외도피자금이라 한다. 세상이 투명해지고 있다고 하나, 올해 10월까지 금융정보분석원(FIU)에 접수된 자금세탁 의심건수가 27만5,344건으로 급증했다니, 꼭 그런 것만도 아닌 모양이다. 국세청이 최근 역외탈세와의 전쟁을 선포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돈 세탁(money laundering)은 1920년대 미국 시카고의 범죄자 알 카포네가 도박, 주류 판매로 얻은 검은 돈을 세탁소들의 수익으로 둔갑시켜 합법화했던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돈 세탁은 제도권 금융에 스며들게 하는 배치(placement), 당국이 알지 못하도록 섞어버리는 겹치기(layering), 기업이나 부동산 주식에 투자, 합법화하는 통합(intergration) 등 주로 세 단계를 거친다고 한다. 이런 정교한 방법에 비해 이상득 의원 비서진의 자금세탁 수법은 너무 뻔하다. 대충 세탁해도 아무도 손대지 못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을까?
이영성 논설위원 leey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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