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해마다 이맘때면 가장 받고 싶어 했던 크리스마스 선물 1호가 자전거였다.
수 년 동안 산타 할아버지한테 소원을 빌었지만 모든 것이 귀하던 당시 나에게 자전거 선물은 오지 않았다. 길에서 어쩌다 자전거 타고 지나가는 사람이 나타나면 부러운 마음에 눈앞에서 사라질 때까지 쳐다보곤 했었다.
결국 나는 형제들이 타다 버려진 창고에 처박혀 있던 유모차를 보고 묘안을 짜냈다. 유치원을 가기도 전이었으니 개조할 능력은 없었고 집 근처 긴 언덕을 이용하기로 한 것이다. 무조건 유모차를 끌고 언덕을 올라가 유모차에 앉았더니 아주 천천히 굴러가다가 서서히 빨라지면서 어린 아이가 느끼기 버거운 속도로 가속이 붙었다. 성공적이었다. 처음에 느껴진 두려웠던 속도감은 금세 익숙해졌고 겁 없는 아이는 어떻게 하면 더 빠르게 내려갈 수 있을까를 골똘히 연구하며 언덕 오르내리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며칠 뒤 돌발 상황을 겪게 된다. 언덕을 신나게 내려가고 있는데 반대편에서 차가 마주 오고 있는 것이었다. 유모차에 방향조작이나 브레이크가 있을 리 없었고 오로지 빠르게 내려가는 법만 연구한 유모차의 달인은 당황한 나머지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순간적으로 몸을 돌려 유모차와 함께 쓰러졌다. 승용차의 운전자를 놀라게 한 것은 물론 나중에 이 사실을 아신 부모님의 호된 꾸중과 유모차 압수는 두고두고 서글픔으로 남았다.
그 뒤로 어른이 되어 맘먹고 산 자전거를 바쁘고 피곤하다는 핑계로 현관 밖에 묶어둔 채 십 년을 방치해 두었다. 나이 들면서 몸이 운동의 필요성을 느끼게 해주니 가끔 한 두 번씩 타다가 이제는 시간 나는 대로 끌고 나간다.
요즘엔 에너지 절약 및 건강 권장 캠페인으로 자전거 인구도 많이 늘었고 자전거 길이 대단히 잘 되어있다. 곳곳에 쉴 수 있는 벤치나 풀밭, 편의점 등 운동하는 사람들이나 나들이객들을 위한 시설도 점점 좋아지고 있다.
특히 한강을 끼고 달리는 강바람의 쾌감은 중독되면 끊기 어렵고 계절마다 몸으로, 눈과 코로 전달되는 자연의 맛은 경험해보지 않고는 알 수 없다.
중간에 휴식을 위해 앉아 있으면서 지나가는 화려한 고가의 자전거들을 공짜로 구경할 수 있는 재미 또한 큰 즐거움 중의 하나이다. 멋진 포즈로 스피드를 즐기는 젊은이들에게서 에너지를 받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세련된 복장과 장비를 갖추고 노익장을 과시하는 수준급 어르신들을 보면서 그 분들의 식지 않는 열정에 존경심이 절로 든다. 요즘도 좀 더 빨리 더 멀리 가고 싶은 마음에 무리를 했다가 숨이 턱까지 차 되돌아오는 길에는 내가 왜 욕심을 부렸던가를 반성하곤 하는데 그 옛날 유모차의 속도에 욕심 부렸던 나의 어릴 적 모습이 떠오른다.
일상에서 벗어나고자 특별히 날을 잡고 계획을 세워야만 가능한 거창한 휴가도 좋고, 그냥 무작정 쉬는 것도 필요할 때가 있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것, 굳이 계획 없이 자주 할 수 있는 일, 자신의 본업 이외에 열정을 가지고 즐겁게 몰두할 수 있는 어느 하나의 취미가 지친 몸과 마음을 재충전 시켜주는 휴가와도 같은 존재가 된다. 이제 자전거는 나에게 있어서 출퇴근용 교통수단, 운동기구, 짧은 휴가, 구경거리, 젊음 그리고 어린 시절로의 회귀 등 많은 것을 아낌없이 주는 애마가 되었다.
언젠가부터 크리스마스가 있는 12월이면 점점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픈 마음이 든다.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올해부터는 산타한테 소원 한 가지씩을 빌어보기로 했다. 음, 올해는 다 닳아서 바꿔야 하는 자전거 바퀴를 선물로 주시겠어요?
송재광 이화여대 음대 교수 ·바이올리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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