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본의 논리앞엔 '슬럼'만 있었다…소박한 사랑과 삶의 냄새는 외면 당한채
서울 중구 롯데백화점 본점과 롯데 영플라자 사이, 소공동으로 이어지는 도로에는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가 놓여있다. 백화점 직원이 도로 한 가운데 서서 교통정리를 하고, 사람들은 그 직원의 말과 손짓에 따라 길을 건너거나 멈춰 선다. 서비스란 명목으로 일개 기업이 국가 질서권을 대신하는 이 장면은 대개 백화점이 문 여는 오전 9시 30분에서 오후 8시 30분까지 지속된다.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자본주의 시스템으로 한 사회를 움직이는 제도, 풍속, 도덕 같은 견고한 것들이 녹아버린 이 시대를 '액체 근대'라고 일컬었다. 롯데백화점과 영플라자 사이, 액체 근대의 공간은 백화점 운영시간에 따라 열리고, 닫힌다.
이 도로가 자본주의 시스템으로 열리고 닫히는 공간이라면 종로3가와 퇴계로3가를 잇는 세운상가는 자본주의 시스템이 세우고 무너뜨린 장소다. 국내 최초 주상복합건물로 세워진 이곳은 8~17층짜리 건물 8개가 모여 있었다. 1968년 완공해 종합 가전제품 상가로 호황을 누리다 1987년 용산전자상가가 문을 열면서 쇠락해 90년대 슬럼가로 불렸다. '세상의 기운이 다 모인다'(世運)는 이름이 제 역할을 못했는지, 2008년 8개 건물을 차례로 허물어 녹지를 만든다는 서울시 계획이 발표됐다. 2009년 맨 먼저 현대상가가 철거됐고, 그 자리에 손바닥만한 공원이 들어섰다. 슬럼가와 녹지가 이상하게 맞물린 이곳을 소설가 황정은(36)은 "공원도 빈터도 전시장도 아닌, 어정쩡하고 기묘한 공간"이라고 말했다. 재개발 철거를 앞둔 상가를 무대로 가난한 남녀의 연애를 그린 소설 <百의 그림자> (민음사 발행)는 현대상가가 헐리고 공원이 조성된 2009년 쓰인 작품이다. 百의>
시간의 퇴적층 사이
흔히 사람들이 '세운상가'라 부르는 곳은 현대, 세운, 대림, 청계, 광도, 아세아 등 8개의 독립적인 상가건물을 잇는 거리다. 대림상가는 오락기와 노래방기기, 세운상가는 조명과 악기, 광도상가는 반도체 등 건물마다 주종목이 따로 있다. 하나같이 미로 같은 좁은 골목에 낡은 전깃줄, 녹슨 간판을 달고 있어, 미끈하게 닦아 놓은 '세운초록띠 공원'과 대조를 이룬다. 작가는 공원 뒤 건물을 가리키며 "세운상가는 이 건물"이라고 일러준다.
1,2층엔 조명기구 도매상이 즐비하고 3,4층에선 컴퓨터와 부품을 주로 팔지만 밥솥부터 휴대폰까지 전자기기는 없는 것 없이 다 판다. 남은 7개 건물 중 제일 번화한 곳이라고 해도 복잡하게 뒤엉켜 있어 길 잃기 십상이다. 작가는 "개축을 해서 같은 층인데도 높이가 다른 곳이 있다"고 말했다.
작가는 등단 전 6년 동안 이 건물 5층에 있는 부친의 음향기기 수리점에서 사무를 보았고, 요즘도 한 달에 두어 번 이곳을 들른다. 부친 황종진(65)씨는 '세운상가 황기사'로 통한다. 이곳에서 30여년 일해온 '황기사'는 기별도 없이 기자를 대동하고 들이닥친 딸에게 연신 "무슨 일이냐"고 물으면서도 가게 안을 조목조목 소개했다. "MP3 때문에 전축이나 오디오 수리 일이 줄지 않았느냐"고 물으니 "빈티지가 유행이라 일이 줄지는 않는다"고 답했다. "예전에는 마니아들이 알음알음 찾아왔지만, 요즘에는 인터넷 카페에 가게가 소개돼 젊은 사람들이 오디오를 들고 찾아올 때도 있어요."
현대상가에 이어 세운상가도 허문다는 소식이 들리지만, 그는 이 일대 재개발 계획이 나왔다 거둬들여진 게 한두 번이 아니어서 늘 그렇듯 백지화될 거라 생각하고 있다.
<百의 그림자> 속 여씨 아저씨가 실재한다면 아마도 이런 모습일 게다. 소설은 여씨 아저씨 수리실에서 접수와 심부름을 맡는 은교와 전자기기 부품(트랜스)을 만드는 공방 견습공 무재의 사랑 이야기다. 그리고 이 둘의 시선을 통해 전자상가 사람들의 삶을 복원한다. 百의>
그늘과 그림자
여기, 연인이 있다. 도심 한복판 40년 된 전자상가를 터전으로 사는 은교와 무재다. 두 사람은 그 흔한 키스 한번 해보지 않은 사이지만, 이들만큼 의연한 사랑을 만나기는 어렵다. 둘은 서로의 가마 모양을 유심히 보면서 "서로를 유일무이한 단독자로 발견"(문학평론가 신형철)하고, 정전이 됐을 때 제일 먼저 상대방에게 전화를 걸어 이쪽도 역시 캄캄하다고, 나는 당신과 같은 어둠 속에 계속 있을 것이라고 용기를 준다. 그리고 잠 못 자는 연인에게 밤 아홉시에 달려가 배드민턴을 치자고 말하고, 쇄골이 반듯한 사람이 좋지만 쇄골이 반듯하지 못한 연인에게 "반듯하지 않아도 좋으니까 좋은 거지요"라고 고백한다.
이 둘을 묶어준 상가는 도심 재개발 명목으로 철거될 운명에 처해 있다. 소설은 두 사람의 시선을 통해 이곳을 생활터전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의 사연을 하나씩 들려줌으로써 수십 가지 경제적 이유를 들어 재개발 논리를 정당화 하는 자본의 무례함에 저항한다.
무재의 아버지는 아홉 식구의 생계를 책임지다 "개연적으로 빚을 지게"되고, 끝내 죽음을 선택한다. 가족을 위해 삶을 바쳤지만 정작 가족들로부터 냉대를 받고 삶의 의미를 잃은 여씨 아저씨와 그의 공장장 친구의 사연도 소개된다. 열두 살 때 비극적인 산재로 아버지를 잃은 유곤씨, 가게가 철거되고 종적을 감춘 '오무사'가게 할아버지의 사연을 통해 작가는 개별적이면서도 보편적인 이 시대 삶의 그늘을 보여준다.
이 그늘은 소설에서 그림자로 형상화된다. 소설 속 인물들은 한때 그림자 분리를 겪었거나 현재 겪고 있다. 그림자는 조금씩 자라나 분리돼 독립된 개체처럼 활보하고, 결국 그림자의 주인을 덮친다. 작가는 이 그림자를 "불행에 편안하게 잠식된 상태"라고 말했다. "빛이 있으면 항상 그림자가 생기는 것처럼, 살면서 절망이나 좌절감을 느끼지 않고 살수는 없죠. 근데 그 절망의 상태가 의외로 편안할 때가 있어요. 좌절을 벗어나려는 의지 없이 그 상태에 빠져 있는 거죠. 살면서 발생하는 어둠에 잠식된 상태를 그림자가 자라서 덮친다고 써보았어요."
'그래서 그림자를 따라가는 기분이 어땠나./ 나쁘지 않았어요./ 자꾸 따라가게 되던데요, 라고 말하자 그렇지, 라는 듯 여 씨 아저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무서운 거지, 그림자가 당기는 대로 맥없이 따라가다 보면 왠지 홀가분하고, 맹하니 기분이 좋거든, 좋아서 자꾸 따라가다가 당하는 거야, 사람이 자꾸 맥을 놓고 보면 맹추가 되니까, 가장 맹추일 때를 노려 덮치는 거야.' (32쪽)
슬럼, 삶의 공간
개별적이면서도 보편적인 삶의 무게가 있는 이 전자상가를 사람들은 슬럼이라고 불렀다.
'이 부근이 슬럼이래요./ 누가요?/ 신문이며, 사람들이.'(113쪽)
도시는 개발과 공동화, 재개발을 반복하며 확장되므로 허물고 정비돼야 할 슬럼은 이 도시 어디에나 존재한다. 때문에 작가는 이 소설 발표 후 "세운상가를 아는 분은 이 소설이 세운상가를 배경으로 썼다고 믿어 의심치 않고, 용산상가를 아는 분이 용산상가를 배경으로 썼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고 말했다. "서울 종로가 아니더라도 그런 공간은 어딘가에 하나쯤 있을 법하고 누구나 자기가 경험해본 그 공간을 떠올리며 읽을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썼어요."
5개 상가 건물 중 고작 하나가 철거됐을 뿐인데도 일제히 '전자상가 철거, 역사 속으로'란 제목을 뽑으며 재건축을 기정사실화하는 언론, 철거된 건물 터에 조성된 공원에서 매주 요란하게 치러지는 행사 등 시대 흐름에 밀려난 자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적 상황을 소설은 예민하게 포착한다.
'차라리 그냥 가난하다면 모를까, 슬럼이라고 부르는 것이 마땅치 않은 듯해서 생각을 하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라고 무재 씨는 말했다./ 언제고 밀어버려야 할 구역인데, 누군가의 생계나 생활계, 라고 말하면 생각할 것이 너무 많아지니까, 슬럼,이라고 간단하게 정리해버리는 것이 아닐까.' (115쪽)
이 소설은 숲에서 어설픈 데이트를 하다 길을 잃고 헤매는 은교와 무재의 대화로 시작해 그들의 삶터인 전자상가의 일상을 소개하고, 다시 섬으로 데이트를 간 연인의 대화로 끝을 맺는다. 섬과 숲은 작가가 등단 후 한때 자주 들렀던 인천 부근의 섬과 강원도의 한 숲을 배경으로 했다. 작가는 "숲과 섬에서 고립감을 상당히 느꼈다"며 "하지만 둘이라서 이런 장소에도 의연하고 애틋하게 가고 있는 상황을 그려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섬 절벽 위 전망대에서 해지는 걸 보고 섬을 나오면 많이 컴컴해요. 그 경험이 무척 인상적이었어요. 그때 어둠 속을 가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결말로 하는 소설을 구상했어요."
작가는 숲과 섬의 구체적인 지명을 밝히기 꺼려했다. 자신이 찾았던 숲과 섬은 소설이 형상화한 숲과 섬이 아니라는 이유다. 그는 현실의 특정 장소 명칭을 소설에서 가급적 사용하지 않는다고도 말했다. 장소를 집어서 말하는 순간 작품의 공간이 협소해지는 느낌이 있어서란다. 세운상가를 소개할 때도 이 부분을 우려했다. 자신의 경험을 모티프로 소설을 썼지만, 소설 속 상가는 세운상가의 절대적 현현이 아니라는 점도 덧붙였다. "(소설 속 공간은) 개인적으로 경험한 공간들을 분할하기도 하고 이어 붙이기도 하는 과정에서 만들어낸 공간, 그러니까 현실도 아니지만 현실에서 완전히 분리된 공간도 아닌 그런 공간이죠."
작가는 이 소설의 처음(숲)과 끝(섬) 모두에서 의도적으로 연인들이 길을 잃게 만들지만, 두 분위기는 사뭇 대조적이다. 숲에서 무재는 은교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혼자 길을 헤매지만, 섬에서 무재는 은교의 손을 잡고 길을 찾아 나선다. 현대사회 고립감을 환상적 묘사와 감각적인 언어로 풀어냈던 작가가 이 소설을 기점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하게 된" 변화상과 닮아 있다. <百의 그림자> 발표 후 작가는 미학적이면서도 정치적인 작품으로 평가받는 소설들을 발표했다. 百의>
자본주의 시스템의 비정함과 인물들의 선량함을 대조하면서 이 세계가 과연 살 만한 곳인지를 묻는 이 소설의 마지막, 무재는 은교가 부르기 전 먼저 이렇게 말한다.
'은교 씨./ 하고 무재 씨가 말했다.// 노래할까요.' (169쪽)
이윤주기자 misslee@hk.co.kr
■ 소설 '百의 그림자'
2009년 문예지 <세계의 문학> 에 발표된 <百의 그림자> 는 당시 문단의 가장 큰 이슈였던 '문학과 정치' 담론을 상징하는 소설로 큰 주목을 받았다. 그 해 용산참사,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를 비롯한 일련의 사건은 문인들의 시국선언인 '6ㆍ9작가선언', 용산참사 1인 시위 등 정치참여로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문인들은 "예술과 정치라는 서로 이종적인 것들을 결합하는 다양한 방식"(진은영 시인)을 찾는 이른바 '문학과 정치'를 당면한 과제로 삼았다. 百의> 세계의>
2000년대 문인들의 문학과 정치 담론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이는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다. 그는 2009년 <문학과 사회> 인터뷰에서 "문학이 사물에 다시 이름을 붙이고, 단어들과 사물들 사이의 틈을 만들고, 단어들과 정체성 사이의 틈을 만듦으로써 결국 탈정체화, 즉 주체화의 형태, 해방가능성, 어떤 조건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들어내는 데 개입한다는 의미에서 정치적인 것"이라고 말했다. 고로 이 시대 문인들의 '문학과 정치' 담론은 과거 1970,80년대 정치현실을 문학작품에 투영하는 참여문학과는 양상이 다르다. 문학과>
이들이 정치적으로 겨냥하는 대상과 형식은 이전 세대와 비교해 훨씬 더 다양해졌다. 복잡다단한 현대사회에서 폭력의 근원이 불분명한 상황을 문학적으로 승화한, 그래서 얼핏 정치적으로 읽히지 않는 작품들도 등장했다. 젊은 작가들의 감각적인 소설, 젊은 시인들의 난해한 언어 실험 등 새로운 형태의 작품들이 '문학과 정치'란 담론과 맞물려 회자됐던 것은 이런 배경에서다.
<百의 그림자> 는 그 연장선에서 읽혔다. 작품이 발표된 후 평단에서는 "간결성이 완벽성을 보장하며, 단순성이 심오함을 입증해주는 시적 사건"(평론가 강지희), "소설의 정치성 논의에서 우선적으로 거론할 만큼 중요한 텍스트"(평론가 한기욱) 등 호평이 쏟아졌다. 百의>
본인이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작가 황정은은 이 '문학과 정치' 담론의 한 가운데 있다. 그는 용산참사 1인 시위와 천주교정의사현구제단의 용산참사 미사에 참석하며 이 소설을 썼다. 그는 "용산참사 관련 집회, 6ㆍ9작가선언 활동이 작품에 영향을 주었냐"는 물음에 "그렇다"고 답했다. "6ㆍ9작가선언 이전에는 나도 뭔가를 말할 수 있다라는 것 자체가 신기해서 작업에 몰두했는데, 6ㆍ9 이후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됐다"고 했다. "안에서 바깥을 응시하고 있다가, 이제 손잡는 법을 배워가는 중인 것 같아요."
이윤주기자 mis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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