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鐵人 박태준 별세/ 허허벌판에 제철소 세워 '영일만의 기적'… 산업화 초석 다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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鐵人 박태준 별세/ 허허벌판에 제철소 세워 '영일만의 기적'… 산업화 초석 다져

입력
2011.12.13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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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6월 포항 영일만 포항제철소 건설 부지 내 현장사무소. 직원들은 박태준 명예회장(당시 사장)이 집무실처럼 사용하던 이 목조건물을 2차 대전 당시 '사막의 여우'로 불렸던 독일군 롬멜장군의 이름을 따 '롬멜하우스'로 불렀다.

박 명예회장은 임직원들을 일렬로 세워놓고 정신무장을 강조했다. "조상의 혈세(대일청구권자금)로 짓는 제철소 건설에 실패하면 모두 '우향우' 해서 영일만 바다에 빠져 죽어야 한다. 기필코 제철소를 성공시켜 나라와 조상의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

그로부터 3년 후인 1973년 6월9일 오전 5시30분 드디어 용광로에선 굉음과 함께 용암 같은 쇳물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박 명예회장을 비롯한 전 직원들은 눈물을 흘리며 만세를 불렀다.

철강은 산업의 쌀이다. 철강이 없으면 자동차도, 배도, 가전제품도 만들 수 없다. 오늘날 우리나라 주력산업인 자동차 선박 전자의 뿌리도 결국은 철강이다. 때문에 대한민국 산업화의 신화는 곧 포스코(옛 포항제철)의 신화이고, 이는 박 명예회장의 신화이기도 하다.

그가 군인에서 경제인으로 변신한 건 5ㆍ16 군사쿠데타 이후다. 일본에서 성장해 1945년 와세다 대학 기계공학과에 입학했지만 해방으로 학업을 중단한 후 귀국, 육군사관학교 전신인 남조선경비사관학교(6기)를 졸업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을 처음 만나 인연을 쌓은 것도 이때였다.

1961년 권력을 장악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그를 비서실장으로 발탁했다. 이후 육군소장으로 예편한 후 텅스텐 수출업체인 대한중석 사장으로 임명되면서 기업인으로 변신했다. 그는 만성 적자기업이었던 대한중석을 1년 만에 흑자기업으로 바꾸었고, 탁월한 경영능력을 높게 평가한 박 전 대통령은 1968년 그에게 "종합제철소를 건설하라"는 특명을 내렸다.

하지만 당시 제철소를 짓는 건 '무모한 도전'이었다. 자본도 기술도 경험도 없는 나라에서, 산업의 기초소재인 철강을 만드는 용광로를 건설한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믿을 건 차관뿐이었다. 하지만 예정됐던 국제제철차관단(KISA)의 자금제공이 무산돼, 제철소 건설자체가 수포로 돌아갈 위기에 처하자 박 명예회장은 하와이에서 농ㆍ어업분야에 사용하기로 돼 있던 대일청구권자금을 전용하는 아이디어를 냈다. 이른바 하와이 구상. 그는 일본 정계와 재계인사들을 직접 설득했고, 마침내 1970년 연산 103만톤 조강 규모의 1기 설비는 착공에 들어갔다. '영일만의 기적'이 이뤄지게 된 것이다.

제철소 건설현장은 사실상 전쟁터였다. 박태준은 사령관이었고, 직원들은 군인이었다. 직원들이 입은 작업복에는 명찰이 부착됐고, 신발 발목엔 전투화처럼 고무줄을 넣었다.

일각에선 박 명예회장을 "경영자라기 보다는 군인이었다" "일본 사무라이를 연상케 한다"고 비판했지만, 그는 특유의 카리스마로 건설작업을 진두 지휘했다.

그는 '종이마패'는 갖고 다녔다. 제철소 공사와 관련한 모든 권한을 박 전 대통령이 일임했음을 기록한 일종의 증서였는데, 그는 이것으로 정치권의 간섭과 이권청탁을 철저히 막아냈다.

포항제철은 조업개시 6개월 만에 흑자를 달성했다. 박 명예회장은 1기의 성공을 바탕으로 1978년 두 번째 신화인 광양제철소 계획을 세웠다. 1982년 광양제철소 완공한 포스코는 10년 후 2,100만톤 생산체제를 구축했다. '원조 철강왕'인 미국의 카네기는 35년에 걸쳐 연산 조강 1,000만톤을 이뤘지만, '한국의 철강왕' 박태준은 25년(1968~1992년)만에 기술도 자본도 없는 상태에서 2,100만톤을 달성했다. 이로 인해 세계 철강업계로부터 그는 '신화창조자(Miracle-Maker)'라는 칭송을 받았다.

1978년 중국의 최고실력자 덩샤오핑(鄧小平)이 일본의 기미츠제철소를 방문한 자리에서 이나야마 요시히로(稻山嘉寬) 당시 신일철 회장에게 "중국에도 포항제철과 같은 제철소를 지어달라"고 했다가 "중국에는 박태준이 없지 않느냐"라는 대답을 들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포스코 역사 40년 중 26년을 CEO로 일했던 그는 1987년 철강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베세머 금상을, 1992년에는 세계적 철강상인 윌리코프상을 수상했다.

유인호기자 yi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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