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환 화백이 미국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3개월간 대규모 회고전을 연 정도를 제외하면 올해 국내 미술계는 관객들의 눈길을 사로잡을 만한 큰 사건이 없었다. 수많은 전시 중에서 새롭게 다가온 것은 잇따라 불어 닥친 다원예술 바람이었다.
조각과 설치, 영상 등을 해오던 작가 김홍석(상명대 공연영상미술학부 교수)씨는 지난 4~5월 서울 소격동 아트선재센터에서 작품 한 점 없는 개인전 '평범한 이방인들'을 열었다. 전시에 소개된 작품 '사람 객관적-평범한 예술에 대해'는 미리 섭외한 연극배우들이 텅 빈 공간에 배치된 의자에 앉아 김씨가 쓴 의자, 돌, 물, 사람, 개념 등 5개 테마의 텍스트를 관객에게 말로 전달하는 것이었다. 의자 주위에 둘러 앉은 관객은 배우와 다양한 반응을 주고 받으며 작품에 개입한다. 아니 개입 자체가 작품이다. 연극과 미술의 경계를 넘나드는 이 전시에 관객은 후한 점수를 주었다.
다원예술은 이미 20세기 후반부터 중요성이 부각돼 21세기를 이끌 현대예술의 새로운 형태로 여겨지고 있다. 국내에 다원예술을 처음 소개해 5년째 행사를 열고 있는 '페스티벌 봄'의 김성희 디렉터는 "다원예술은 단순한 매체 혹은 장르간 상호 교류보다 더 적극적이고 유기적인 담론인 횡단의 개념이자 예술적 관습을 초월하는 시도"라고 설명한다.
매년 3월 중순 시작해 한 달간 열리는 페스티벌 봄은 미술은 물론 연극, 현대무용, 영화, 음악 등 다원예술 범주에 드는 모든 장르를 포괄한다. 올해 선보인 작품 중에는 개성공단의 티셔츠 제작 과정을 영상으로 촬영한 독일 작가 디륵 플라이쉬만의 작품 '나의 패션쇼'를 실제 패션쇼로 재현한 것도 있었다. 연세대 미디어영상학부 교수이자 작가인 서현석씨는 철공소가 늘어선 세운상가 골목길에서 관객이 카세트 테이프를 통해 전달된 키워드에 따라 을지로 일대를 걷는 퍼포먼스 '헤테로토피아'를 선보였다.
해를 거듭할수록 다원예술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관객 역시 크게 늘고 있다. 지난 5~7월 서울 문래동 일대에서는 열린 장소특정적 예술 프로젝트 '스피어스(Spheres)' 관람을 위해 스마트폰을 가지고 문래동 일대를 순회하는 관객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문래예술공장 옥상, 철공소, 공원, 철로변, 거리 등 문래동 6개 지점에 음악을 감상할 수 있는 QR코드를 부착해 지역의 역사성과 개인적 경험을 연계시켜보는 프로젝트다. 가구 디자이너이자 사진작가인 장민승을 주축으로 음악가 정재일, 디제이 소울 스케이프(박민준) 등 참여 작가들은 서울시창작공간 문래예술공장의 지원을 받았다.
9월 영등포 시장 일대에서 열린 서현석씨의 '영혼 매춘' 프로젝트도 눈길을 끌었다. 관객이 한 명씩 참여하는 퍼포먼스로, 사전에 작가가 섭외한 여관, 웨딩홀, 극장, 점쟁이 할머니 등을 직접 방문해 허구와 실재가 혼재된 상황에 맞닥뜨린다. 마치 영화 속 주인공처럼 영등포시장 일대를 돌아본 그들은 소리와 이미지를 통해 그곳의 일상과 역사적 단면을 입체적으로 체험할 수 있었다.
지난 8월 서울 서계동 국립극단에서 열린 '고래, 시간의 잠수자'도 극장이라는 가변적 공간에서 퍼포먼스, 무용, 사운드아트, 연극, 설치미술 작가들이 모여 시간과 장르를 넘나드는 작업을 선보였다. 전시를 기획한 김해주 연구원은 "미술작가들의 사용 매체가 다양하다 보니 다원예술의 아이디어가 미술가들에게서 나오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이 같은 흐름에 맞춰 지난 4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는 현대미술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다원예술의 수용과 공간활용 방안' 국제 심포지엄이 열리기도 했다.
다원예술 작업에 대한 관객의 높은 호응에 김 연구원은 "사건 발생 공간에 관객이 공존한다는 점 때문에 반응이 좋은 것 같다"고 분석했다. 김성희 디렉터 역시 "다원예술이 가져온 가장 중요한 변혁은 관객의 체험"이라며 기존의 완결된 전시와 달리 관객의 경험에 다원예술의 의의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인선기자 kell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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