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초 르노삼성자동차 관계자가 A카드사를 찾아왔다. 음식점 업주들의 집단행동 이후 카드 수수료 인하 요구가 주유소, 유흥업소 등 전방위로 봇물처럼 번질 무렵이다. 르노삼성 측은 "이 참에 자동차 수수료도 깎아달라"고 했지만, A카드사는 "중소가맹점 범위(연 매출 2억원 미만)와 수수료를 낮춘 터(1.8% 이하)라 추가 인하가 어렵고, 더구나 자동차업체는 대기업 아니냐"며 단칼에 거절했다. 르노삼성 직원은 수긍한 듯 군말 없이 돌아갔다.
불과 한 달 새 상황은 역전됐다. 르노삼성을 위시한 한국GM, 쌍용자동차 등 자동차 3사는 최근 일부 카드사에 수수료 인하 요구를 관철시켰다. 다른 카드사들도 투항할 것으로 보인다. 업계 대부인 현대자동차가 앞서 카드사들을 죄다 굴복시키자 명분과 힘을 얻은 셈이다.
사실 현대차는 6월부터 수수료를 낮춰달라고 줄기차게 요구했다. 카드사들은 "대기업이 너무 한다"는 논리로 맞서며 연합전선을 폈다. 10월 말 가맹점 계약이 끝난 KB국민카드가 현대차로부터 카드 결제 전격 중지라는 일격을 당한 뒤에도 카드사들의 결속은 공고했다.
그러나 지난달 21일쯤 현대차가 최후통첩을 하면서 카드연맹에 금이 갔다. "신용카드 가맹점 수수료율을 1.75%에서 1.7%로, 체크카드는 1.5%에서 1.0%로 당장 낮추지 않으면 계약기간과 상관없이 12월 1일부터 계약을 해지(카드결제 중지)하겠다"는 반 협박에 결국 변절자가 생긴 것이다. 대오는 와르르 무너졌고 다른 카드사들도 모조리 현대차에 무릎을 꿇었다.
이후 카드사들은 '네 탓' 공방으로 자중지란을 일으켰다. 누군가 먼저 대기업(현대차) 수수료를 깎아주는 바람에 한 묶음으로 "강자엔 약하다"는 욕만 잔뜩 먹고, 다른 업종에 대한 수수료 인하 거부 논리조차 궁색한 지경에 이른 것이다. 범인이 누구냐를 놓고 설왕설래가 한창인가 하면, 상대를 헐뜯는 이전투구 양상도 보인다.
삼성카드가 먼저 용의선상에 올랐다. 현대차의 요구를 받아들여도 피해가 상대적으로 덜한데다, 사활을 걸고 숙명의 라이벌 현대카드와 순위 다툼을 하고 있어 선수를 쳤다는 게 다수 카드사들의 설명이다.
사실 현대차의 요구는 KB국민카드 같은 은행계보다 삼성 현대 등 전업카드사에 유리한 측면이 있다. 신용카드는 인하 폭이 0.05%포인트에 그쳤지만, 체크카드는 0.5%포인트라 체크카드 비중이 큰 은행계가 불리할 수밖에 없다. KB국민카드가 결제 중지라는 절체절명의 위기에도 끝까지 버틴 건 신용카드 대 체크카드 비율(물품구매 기준)이 76 대 24에 이른데다, 앞으로 체크카드 비중을 더 늘릴 계획이기 때문이다. 반면 전업카드사는 체크카드 비중이 고작 2~4% 수준이다.
삼성카드를 의심할 만한 전례도 있다. 한 카드사 관계자는 "서울시 교통카드사업자인 한국스마트카드가 5, 6년 전 택시 결제시스템을 깔면서 카드사에 불리한 계약 조건을 내걸어 업계 전체가 뭉쳐 한판 붙었는데, 당시에도 삼성이 먼저 계약을 하는 바람에 일이 어긋났다"고 지적했다.
정작 삼성카드는 "헛소문"이라고 발끈했다. 삼성카드 관계자는 "(현대차 수수료는) 현대카드와 씨티카드가 먼저 내린 걸 업계가 다 알고 있다"며 "나머지 자동차업체도 현대가 먼저 인하했다"고 날을 세웠다.
현대카드는 "(현대차 수수료를) 누가 먼저 인하했는지 모르겠다"는 입장이다. 다만, "자동차 3사를 먼저 내린 건 사실이고, 현대차와 비슷한 시기에 요구가 들어와 함께 처리한 것뿐"이라고 밝혔다. 현대차 계열인 현대카드는 체크카드 비중이 1%에 불과하다.
업계 일각에선 "가뜩이나 수수료 문제로 업계 전체가 궁지에 몰려 있는데, 서로 책임까지 떠밀고 있어 곤혹스럽다"는 반응이다.
어찌됐든 카드사들의 현대차 수수료 인하 요구 수용이 또 다른 물꼬를 튼 건 사실이다. 영세업자를 넘어 자동차업계 등 대기업과 교통카드사업자 같은 독점기업, 상대적으로 먹고 살만한 병원과 약국, 한의원까지 목소리를 높이는 실정이다. 부가서비스 축소 외엔 뾰족한 수도 없다고 하니 고래 싸움에 새우(고객) 등만 터지는 격이다.
고찬유기자 jutda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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