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
대낮에도 검은자들이 찾아온다 처음에 검은자들은 푸른자들이었다 푸른자들이 끝 간 데까지 가 제 몸을 불살라 토해놓은 이 검은자들이 나는 무섭다 검은자들의 검은 피톨들 점점 내게 옮겨오고 궁궐의 물빛 검어지고 정원의 이파리들 모두 검고 검은 하늘에 검은 궁궐 떠가고 검은 궁궐에 검은 내가 둥둥 검은자들을 나는 무슨 글자로 써내려가나 하거나 말거나 검은자들은 내가 써내려간 글자들을 먹어치운다 먹성좋게 내 이름자도 왕의 치세도 사각사각, 사각사각 소리만 종일 들린다 눈귀 어두운 왕이 이 검은자들을 알 리 없고 나는 다만 무서워 검은자들 사이로 몸을 낮춘다 글자들 도무지 분간할 수 없고 물정 또한 모두 흩어지니 너무 쉽게 나는 한 검은자에서 다른 검은자로 쉴새없이 미끄러 미끄러만 지누나
● 명나라 말의 철학자 이탁오는 자기 책의 이름을 ‘분서(焚書)’라고 지었대요. 불태워 버려야 할 만큼 불온한 글을 쓰겠다는 이 장대한 포부. 책을 펼치기도 전에 그 안에 적힌 뜨거운 글자들로 손에 화상을 입을 것 같은 제목입니다. 또 다른 책의 이름은 ‘장서(藏書)’, 감추어야 할 책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영혼이 푸르다 못해 불타서 검은 자(者)들이 있습니다. 그런 자들이 쓰고 제 삶으로 살아냈던 검은 자(字)들. 우리는 이 검은자들을 황홀하게 바라볼 뿐. 만일 이 시가 그런 자들에 대한 감동어린 예찬일 뿐이었다면 지나칠 수 있었을 텐데요. 괴로워하는 시인 때문에 그럴 수가 없어요. 그렇지요. 아무나 끝 간 데까지 제 몸과 영혼을 불사르며 검은자로 남을 수는 없겠지요. 그렇지만 여기저기 불탄 자리를 옮겨 다니며 지금이라도 다르게 살 방법은 없는 것인가 우리는 자문해봅니다. 시인처럼 겨울 내내.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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