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은행 지점장이라면 지위가 대단했죠. 전담 비서와 운전사 딸린 전용차량은 기본이고, 지방에선 행사 때마다 군수와 나란히 앉는 지역 유지(有志)로 통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이요? 허허허…."
'소행장'의 추억
김명호(가명ㆍ53)씨는 대형 시중은행의 서울 종로 지역 지점장이다. 현재 10명의 부하직원이 밑에 있지만, 그를 수발해주는 직원은 아무도 없다. 그저 '함께' 일할 뿐이다. 지점 밖에서 고객을 만나려면 직접 차를 몰고 나가야 한다. 과거와는 달리 지점 내부살림을 전담 관리하는 차장급 직원도 없다. 영업도 조직 관리도 모두 지점장 몫이다.
1982년 입행 당시 그에게 지점장이 된다는 건, 군대로 치면 '별'을 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 이상은 기대도 하지 않았다. 사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소행장'으로 불리는 지점장이면 충분했다. 대형 지점의 경우 인원이 100명에 달했고, 지점 규모가 작아도 30명은 넘었다. 창구를 맡는 말단 행원은 고참들 너머 지점장 얼굴 한 번 보기도 힘들었다.
칼날이 지나가고
세상이 바뀐 건 1990년대 후반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은행권에 합종연횡이 일어나면서 구조조정의 칼바람이 몰아쳤는데, 인력의 절반 가까이가 이를 피하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잘려 나갔습니다." 지점장의 위상에 변화가 오기 시작한 것도 이 때부터다. 주먹구구식 대출로 부실을 키운 주범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쓴 채 막강했던 권한을 내려놓아야 했다.
지점장의 기존 권한은 시스템으로 대체됐고, 자연스럽게 지점장의 권력과 권위는 허공에 흩어졌다. 이는 은행 시스템의 비인간화 과정이기도 했다. "외환위기 이후 '글로벌 스탠더드' 개념과 함께 은행에 미국식 신용평가시스템이 도입됐어요. 객관적 데이터를 토대로 금리 수준과 대출 한도 등을 산출하는 방식이다 보니, 사람의 주관적 판단이 더 이상 쓸모 없게 된 셈이죠."
초라해진 지점장
대출 승인을 본점에 구축된 시스템이 결정하면서 지점장의 위상은 갈수록 추락했다. 물론 의사결정 과정에서 지점장이 완전히 배제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시스템과 맞서려면 큰 용기가 필요하다. "지점장이 심사의견을 낼 수 있고 별도 승인신청도 할 수 있지만, 잘못되면 돌아올 문책이나 변상이 두려워 실제 그런 위험을 감수하는 지점장은 거의 없는 게 현실입니다."
권한이 사라진 자리에 다양한 의무가 채워졌다. 조직 관리 책임은 가중됐고, 과거 그리 중요한 역할이 아니던 영업과 고객 관리에도 적극 나서야 한다. 금융환경의 변화에 따라 점포당 인원은 축소된 반면, 점포 수가 크게 늘면서 경쟁이 한층 격화한 탓이다. 게다가 온갖 복합ㆍ파생상품의 등장으로 업무가 방대해져 금융 공부도 쉴 수 없는 처지다.
실적 부진하면 아웃
무엇보다 부담스러운 건 실적 관리다. 지점장 평가의 절대적 잣대가 바로 실적이기 때문이다. 지점장은 자신의 실적뿐 아니라 자기가 맡은 지점의 실적까지 챙겨야 한다. "최소한 받는 급여만큼의 실적을 올려야 한다는 건 모든 직원에게 적용되는 원칙입니다. 게다가 지점이 낙오하면 자신의 자리를 내놓아야 하는 지점장으로선 절박하지 않을 수 없죠."
경쟁은 은행 내 지점끼리 더 치열하다. 김 지점장이 근무하는 은행의 경우 자산 규모와 성격이 비슷한 점포 36개를 '또래집단'으로 묶어 서로의 실적을 비교한다. 실적이 하위 20%인 점포의 지점장 중 일부는 자리를 빼앗기고 '후선'에 배치돼 따로 개인영업을 하며와신상담 훗날을 도모해야 한다. 하지만 "한 번 후선으로 밀려나면 다시 돌아오긴 쉽지 않다"는 게 김 지점장의 설명이다.
기업영업점은 2인1조
다른 시중은행 지점장인 박기현(가명ㆍ46)씨가 맡은 곳은 기업영업지점이다. 이 지점의 구성은 10명 안팎인 개인영업점보다 더 단출하다. 박 지점장과 부지점장 단 둘이 지역 내 기업 고객들을 관리한다. 현재 박 지점장이 관리하는 기업만 80곳에 육박한다.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업무가 세분화한 결과다. 그래도 점포 수익은 연간 80억~90억원에 이른다.
기업영업지점장은 '만능 엔터테이너'가 돼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고객 스타일이 천차만별인 만큼 일단 음주가무는 기본이고 당구나 골프 등 '잡기'에도 능해야 한다. 박 지점장은 "영업을 위해 사람을 만나는 게 가장 힘들다"고 토로했다. 예전엔 지점장으로서 각 기업 대표의 얼굴만 알아둬도 쉽게 거래가 됐지만, 이젠 '좋은 관계' 유지가 필수다.
'갑'에서 '을'로
지점장 위상의 추락은 수요ㆍ공급의 법칙 탓이기도 하다. 자본시장이 발달하지 않았던 과거엔 돈이 필요한 곳은 많았던 반면, 자금 조달처는 사실상 은행뿐이었다. 정부 정책에 따라 은행이 대기업에 돈을 몰아주고 나면 중소기업이나 가계는 돈 구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니 은행의 문턱을 지키고 있는 지÷揚?'갑'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금융회사가 다양해지면서 독점적 지위를 잃은 은행이 '을'의 입장에서 호객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됐고, 그 첨병 역할이 지점장에게 떨어진 것이다. 김 지점장은 "은행의 기업지원이 활발했을 때엔 국가경제의 동맥 역할을 한다는 긍지가 강했는데, 갈수록 수익성만 강조되다 보니 그런 자부심이 사라진 지 오래"라고 했다.
김 지점장은 인터뷰 내내 밝은 표정을 지으려 애썼지만, 희미한 미소 속엔 달라진 현실에 대한 체념이 얼핏얼핏 드러났다. 그는 "부하직원들이 실적 경쟁에 매몰돼 자칫 인간성을 잃지 않도록 직원들이 직접 흑판에 '긍정의 말'도 쓰도록 하고 직원 표정이 굳어 있으면 다가가 풀어주기도 한다"고 했다.
권경성기자 ficcione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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