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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사람/ 14년간 김훈 중위 의문사 파헤쳐 온 인권운동가 고상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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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사람/ 14년간 김훈 중위 의문사 파헤쳐 온 인권운동가 고상만씨

입력
2011.12.09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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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14년 전 일에 아직도 잔뜩 화가 나 있었다. 스물 여덟 청년에서 마흔 한 살 중년이 됐건만 여전히 언성을 높이고 손으로 탁자를 치며 그 날을 얘기했다.

1998년 2월 24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241GP 3번 벙커 안에서 육사 출신의 경비대대 2소대장 김훈(당시 25세) 중위가 숨진 채 발견됐다. 모두가 '맞다'고 인정한 사실은 이게 전부다. 사망 원인과 시각, 사망 현장에서 발견된 흔적과 물건에 대한 설명은 저마다 다르다. 국방부는 "자살했다"고 결론 냈고(1999년), 대법원은 "국방부 초동 수사가 잘못돼 자살인지 타살인지 알 수 없으나 고의적인 은폐나 조작은 없었다"고 판단했다.(2006년) 군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는 "진상 규명이 불가능하다"고 결론 내렸다.(2009년)

그러나 이 사람은 유가족과 함께 14년 내내 "자살이 아니다"라고 외치고 있다. 천주교인권위원회 간사로 일하다 우연히 김 중위 유족을 만나 지난한 싸움을 벌여온 인권운동가 고상만(41)씨다.

그는 대뜸 "국방부가 나를 허위사실 유포 혐의로 고소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 중위 의문사 관련 영화를 찍든 책을 내든 무대응으로 일관하는 국방부에 대한 절규였다.

14년 전 국방부 수사팀은 김 중위 사망사건을 이렇게 발표했다. "김 중위가 자신에게 지급된 권총으로 원인은 알 수 없지만 3번 벙커에서 낮 12시~12시20분 사이에 자살했다."(1998년 4월 29일) 이후 죽음을 둘러싼 의혹이 증폭되면서 김대중 당시 대통령의 지시로 특별합동조사단이 꾸려졌지만, 조사 결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특조단에 따르면 김 중위가 사건 당일 오전 5시50분경 일어나 병사들 근무 상황을 순찰하는 등 업무를 봤으며, 오전 11시40분경 상황실 옆방에서 수색 정찰 계획서를 확인하다가 밖으로 나간 게 마지막으로 목격된 모습이다. 그리고 30분 뒤 식사 때문에 그를 찾아 다니던 한 소대원이 3번 벙커 안에서 숨져 있는 그를 발견했다. 특조단은 "자신의 적성과 상관없이 부모의 강요에 따라 육사로 진학했다"는 등을 원인으로 꼽으며 자살로 결론 내렸다.

김 중위 사망 소식에 가장 먼저 의혹을 제기한 사람은 아버지 김척(68)씨였다. 육사를 나와 37년간 군에 몸 담은, 육군 중장 출신이다. 사망원인에 의문을 품었던 김씨는 천주교 인권위에 사망 현장에서 발견된 것과 똑 같은 모형 권총까지 들고 와 의혹을 세세히 설명했다. 유족과 천주교 인권위는 객관적인 증명을 위해 98년 9월 재미 법의학자 노영수 박사도 한국에 초청했다. 노 박사는 서울대 의대를 졸업한 뒤 미국으로 이민 가 권총 자살과 타살 사건 시신만 1,000구 넘게 부검한 법의학자였다.

노 박사는 11가지 근거를 들어 타살을 주장했다. ▦오른 손에서 발사된 탄환 잔여물(화약흔)이 발견되지 않았고 ▦총상 입구와 머리 속에 생긴 총알 진행 방향이 권총 자살 때 생기는 특성과 일치하지 않으며 ▦권총에 지문이 없고 ▦머리 상반부 가운데 피하조직에서 혈종, 오른손 손등에 찰과상이 있는 것 등으로 미루어 몸부림 중에 머리 위를 맞고 의식을 잃은 후 총을 맞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국방부는 노 박사의 주장을 배척했다.

14년간 이 사건에 매달려온 고씨가 주목하는 것은 두 가지다. 화약흔과 철모. 사망현장에서 발견된 베레타 9㎜ 권총은 쏘는 사람의 손에 화약흔이 남는다. 하지만 김 중위 오른손에서는 화약흔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노 박사가 미국으로 돌아간 후 유족은 끈질긴 요구로 국방부로부터 사망 현장 사진 200장을 받았다. 그 중에 권총을 반쯤 덮고 있는 철모 사진이 있었다. 국방부는 "사망 직후 현장에 온 미군 군의관이 경황이 없어 총 위에 벗어놓은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고씨는 "철모 턱 끈이 한쪽으로 말려 올라가 있고, 군의관은 위장을 하지 않는데 이 철모에는 위장크림이 발라져 있는 점 등을 보면 '죽었다 깨어나도' 한국군 철모"라고 주장했다. 그 군의관과 동행했던 위생병도 그의 철모가 아니라고 했지만, 국방부는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1998년 8월말 서울역 근처에서 약국을 하는 김 중위의 이모에게 한 병사가 찾아와 약값을 치르면서 "권총 번호를 잘 보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국방부는 김 중위가 자신의 총으로 자살했다고 발표했지만 이 제보로 다른 병사의 총임이 밝혀졌다.

또 이름을 밝힐 수 없는 많은 병사들의 제보로 퍼즐을 맞춰왔지만, 김 중위가 왜 사망했는지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고씨는 "김 중위 사건은 여전히 미제지만, 과거 사망자의 몸을 씻고 군복을 다 빨아놓는 등 증거를 모두 없앴던 군내 의문사 수사 방식이 김 중위 사건 후 확 달라진 점은 보람"이라고 말했다. 인권단체를 떠나 이제 서울시교육청 감사관실에 몸 담고 있는 그가 계속 김 중위를 붙들고 있는 것도 같은 이유다. 그는 "정부가 상설 군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를 만들어 의문의 죽음을 명확히 밝히도록 하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그가 짐작하는 범인은 없을까. 물론, 있다. 기자에게 정황 증거도 여러 개 제시했다. 하지만 그는 누구라고는 하지 않았다. 다만 "자살은 절대 아닙니다"고 했다.

김 중위의 부모는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김 중위의 장례를 치르지 않겠다고 했다. 화장된 그의 유골은 지금 경기 고양시 벽제의 1군단 헌병대 창고에 있다. 14년째다.

남보라기자 rarar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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