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무슨 명함인가 싶었다. 잘 나가는 의대 교수라고 들었는데, 명함이라고 건넨 것이 A4용지로 출력해 잘라 만든 것이었다. 거기에 자신을 닮은 빡빡머리에 안경 쓴 캐릭터까지 그려 넣었다. 캐릭터 이름이 '해랑'이란다. '해부학 사랑'의 줄임말이다.
아주대 의대 해부학교실 정민석 교수는 10년 넘게 명함을 만들어 쓰고 있다. "만드는 비용도 싸고, 많이 넣고 다녀도 지갑이 두꺼워지지 않아 좋다"는 이유에서다. 7일 경기 수원시 영통구에 자리잡은 아주대 의대 연구실에 들어서자 빡빡 민 머리에 '추리닝' 차림을 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정 교수가 기자를 맞았다. 괴짜다 싶었다.
정 교수는 "11년째 막노동을 하고 있다"고 했다. '막노동 의사'라니? 햄버거와 소주처럼 도통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 그런데 설명을 듣고 보니 딱 그 말이 맞았다.
정 교수는 최근 한국 남성의 3차원(3D) 인체해부지도를 완성했다. 컴퓨터단층촬영(CT)처럼 한 단면만이 아니라 사람 몸 안을 입체적으로 들여다볼 순 없을까, 고민한 게 계기였다. 시신을 단면마다 촬영해 합치면 3D 영상을 만들 수 있겠다고 생각한 것이 2000년이었다.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의 지원을 받아 무게 15톤인 연쇄절단기를 들여왔다. 국내 의대 실험기기 가운데 단일 규모로는 최대다. 알루미늄을 자르는 밀링머신을 개조해 만들었다. 그런 다음 기증받은 남성 시신을 발끝부터 머리까지 0.2㎜ 두께로 잘라냈다. 키 170㎝인 이 남성은 폐렴으로 사망했다. "0.2㎜ 자르고 사진 찍고, 또 자르고 사진 찍는 일을 반복했어요. 영하 70도에서 얼린 시신이 녹을까 봐 겨울에만, 그것도 창문을 모두 열어놓고. 석 달간 사진 8,500장을 찍었습니다. 막노동이 따로 없죠." 컴퓨터로 찍은 사진을 일일이 겹쳐 3D 영상을 만드는데 꼬박 8년이 걸렸다. 잘려진 시신은 모아 화장했다.
정 교수는 "가상 수술을 하는데 3D 인체해부지도를 쓸 수 있다"며 "경험이 부족한 레지던트가 수술 경험을 쌓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그는 지난해부터 똑같은 연구를 다시 하고 있다. 이번엔 여성이다. 이 여성은 26세에 위암으로 목숨을 잃었다.
최소 5년 이상 막노동에 가까운 연구를 계속해야 하는 상황. 그런데도 신이 난단다. "세계에서 한국의 3D 해부지도를 최고로 치기 때문"이란다. 3D 인체해부지도는 1994년 미국에서 가장 먼저 시작했으나 시신을 1㎜씩 절단해 만들어 정확도가 낮다. 중국은 벌써 해부지도를 9개나 제작했지만 질이 떨어진다. "독일 등 유럽에서 자료로 쓰고 싶다고 우리 데이터를 달라고 해요. 얼씨구나 좋다고 주죠. 한국 과학기술을 뽐낼 수 있는 좋은 기회니까. 막노동꾼이 과학외교관으로 바뀌는 거 한 순간이더라고요.(웃음)"
해부학자라고 매일 시신만 보는 건 아니다. 틈날 때마다 창작의 고통에 휩싸인다. 이번엔 만화가다. 정 교수는 '해랑'이 주인공인 네 컷 만화 '해랑 선생의 일기'를 매주 한 편씩 그려 자신의 홈페이지(anatomy.co.kr)에 올린다. 벌써 11년째다. "그림이 낙서 수준"이라면서도 자신감에 차 있다. 그 "근거 없는 자신감"을 뒷받침하는 것은 이야기, 그리고 웃음에 있다.
만화 얘기에 신난 정 교수가 대뜸 물었다. "짱구와 오징어의 가장 큰 차이점이 뭘까요?"기자가 고개만 갸웃거리자, 그가 말했다. "못 말린다는 거예요. 오징어는 말릴 수 있지만 짱구는 못 말리잖아요.(웃음)" 만화 '짱구는 못 말려'를 인용한 농담이다. 그의 만화는 이런 식으로 어려운 해부학 원리를 쉽게 설명한다.
최근엔 지금껏 그린 만화 550편 중 300편을 추려 번역하고 있다. 미국에서 정식 출판하겠다는 생각에서다. 올해 9월 '해랑 선생의 일기'를 교육의 관점에서 바라본 논문이 국제 학술지 <해부과학교육(ase)> 에 실려 한껏 자신감을 얻은 덕분이다. "교수가 만화나 그리고 있냐"는 핀잔도 훌훌 털어냈다. "2006년 국내에서 펴낸 책이 쫄딱 망했는데, 간덩이가 팅팅 부은 거죠. 그래도 꼭 내고 싶어요. 과학은 재밌어야 하니까." 해부과학교육(ase)>
정 교수는 스스로를 "의사를 포기한 과학인"이라고 했다. 막노동꾼, 과학외교관, 만화가 모두 과학인이기에 가능했다는 얘기다. 그는 진료를 하지 않고 기초의학 연구만 한다. 하지만 전체 의대생 중 기초연구를 희망하는 학생은 1% 남짓. "공대나 이과대에서 의학전문대학원에 오는 학생들도 마찬가지예요. 기초의학 연구를 하겠다는 학생은 찾기 힘들죠. 과학인이 되는 걸 접고, 모두 의사가 되려고만 합니다. 안정적이니까. 근데 참 씁쓸해요. 좀 더 도전적이어도 될 텐데…." 웃음 가득한 '괴짜 교수'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한숨을 내쉰 건 그때였다.
변태섭기자 liberta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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