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재수의 난, 4·3항쟁… 핏빛 기억을 안은채
동장군이 슬며시 고개를 내밀 즈음 꽃봉오리를 틔우기 시작하는 동백꽃은 강인한 생명력의 상징이 되곤 한다. 그러나 이듬해 봄이 오면 피처럼 붉고 커다란 꽃송이는 흙 바닥으로 하염없이 고개를 떨군다. 한겨울의 추위도 견뎌낸 꽃의 뒷모습은 한없이 쓸쓸하다. 동백꽃만 보면 '그때' 일이 생각난다던 할머니는 얼마나 오랫동안 가슴 속 멍에를 안고 울음을 삼켜야 했을까.
지금은 관광 명소로 떠올랐지만 60여년 전 이곳은 북제주군에서 9,185명, 남제주군에서 4,756명 등 1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유혈의 땅이었다. 1948년 4월 3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 전역에서 일어난 민중항쟁은 긴 시간 사회적 금기와 사람들의 침묵 속에 묻혀있어야 했다. 제주 4ㆍ3 민중항쟁이다.
제주 출신의 강요배(59) 화백은 그림을 통해 당시의 원혼들을 세상 밖으로 끌어냈다. 50여점의 '제주민중항쟁사' 연작은 1989년부터 1992년까지 3년에 걸쳐 완성됐다. 삼별초 항쟁부터 이재수의 난, 해녀항쟁까지 제주도에서 일어난 무시무시한 역사의 과정이 강렬한 명암대비와 세밀한 묘사로 살아났다. 이 전시로 강 화백은 작가로 새롭게 자리매김했고, 그의 작품을 보고 충격을 받은 서울대 미대 동창 박재동 화백은 4ㆍ3항쟁 만화 '오돌또기'를 그렸다.
동백꽃이 꽃망울을 터트리기 시작한 11월 중순, 제주 한림읍 귀덕리에 자리해 '귀덕화사'라고 불리는 강 화백의 작업실을 찾았다. 도무지 작업실이라곤 있을 것 같지 않은 농로 사이를 들어가다 보니 붉게 물든 담쟁이가 포근히 감싼 작은 건물이 보인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 '잘 알지도 못하면서'에도 등장했던 바람 많고 경관이 아름다운 곳이다.
최근 제주에서 '풍화' 전시를 마친 강 화백의 작업실에는 작품이 남아있지 않았다. 수십 개의 물감과 붓, 그리고 작은 캔버스에 그려진 탐스러운 노란 과일만 보였다. "한 차례 수확이 끝나서 창고로 보냈다"고 한다. 신문에서 오려낸 영국 학생들의 등록금 시위부터 정신을 잃고 경찰에 연행되는 이들까지, 해외에서 격렬하게 대치하는 시위 현장 사진이 한쪽 벽면에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화폭에 되살아난 제주의 비극
4ㆍ3항쟁 연작은 훗날 '동백꽃 지다'라는 책으로 묶여 당시 상황을 경험한 제주도민들의 증언과 함께 실렸다. 책 머리말에는 강 화백이 이 연작을 그리게 된 계기가 적혀있다.
"혹, 내 생에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다면 내가 꼭 해야만 할 일은 무엇인가? 그때에 이르러서야 나는 4ㆍ3을 생각했다. 내 고향 제주, 그 섬에 무슨 일이 있었던가?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 폭압적 살인 기제의 작동, 매몰 협박 감시에 의한 인멸과 봉인, 살아남은 사람들의 울분과 눈물, 그리고 침묵. 그러나 그것은 내 일천한 인생 경험, 짧은 호흡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80년대 후반, 강 화백은 불혹에 가까운 나이였다. 수술과 경제적 어려움으로 심신이 지칠 대로 지쳐 있었지만 사회는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외침으로 뜨겁고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그저 무기력한 개인으로서의 존재를 절감해야 했던 그는 제주도에서 벌어진, 그러나 여전히 침묵해야만 했던 가슴 아픈 역사를 담기로 했다.
제주 4ㆍ3항쟁은 역사 속에 묻힌 지 20년이 훌쩍 지난 70년대 후반에야 소설로 그 진상이 차츰 드러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때문에 경찰에 연행돼 고문을 당하던 암울한 시기이기도 했다. 그 역시 고향의 역사를 공부 삼아 그림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어쩌면 혼란스러운 사회에 대한 일종의 부채의식이었는지도 모른다.
"누구나 애향심이 있겠지만 전 누구보다 강한 편이었어요. 제주에서 나고 자랐지만 대학생 때부턴 20년쯤 서울에 살았지요. 한동안 비극적인 제주의 현대사를 그림으로 그릴 수 없을까 고민했어요. 내가 태어나기 전의 일들을 생생하게 그리려다 보니 당시 경험한 분들의 증언을 토대로 상상력을 극대화하는 수밖에 없었지요."
회화, 조각을 하는 후배 3명과 그는 경기도의 허름한 농가로 찾아 들었다. 지금은 고양시 덕은동이 된 그곳의 낮과 밤은 외롭고 고요하기만 했다. 강 화백은 원혼들의 영매가 된 듯, 증언을 읽고 또 읽으면서 붓으로, 펜으로 당시 상황을 묘사했다. 그럴수록 억울하게 죽은 혼령들이 다가오는 느낌을 받는 초현실적인 체험을 하기도 했다.
"환상, 환청까진 아니지만 혼령들이 수호신이 되어줬다고 해야 할까. 귀신에 시달리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보호하고 수호해주는 느낌이 있었어요. 그들이 용기도 북돋아준 덕에 자신감도 생겼지요. 최대한 정직하게 그리려고 했죠."
그러나 대가가 없지 않았다. 마치 그 일을 겪은 듯 참혹한 장면과 매일 마주하면서 몸과 정신은 점점 피폐해졌다. 휴식이 필요했다. 마흔에 접어든 그가 '제주민중항쟁사' 전시를 마치고 한 일은 어머니 대지, 제주의 품에 안기는 것이었다. 안온한 품속에서 그는 "치유 받았다"고 했다.
제주도에 귀향하고 첫 10년은 자연을 온전히 몸으로 느끼는 시간이었다. 파도가 치고 나뭇가지가 뻗어 나가는 형상을 오랜 시간 마주하니 결국 자연의 모든 것은 변형의 연속이었다. 바다, 나무, 불, 흙, 쇠 등의 오행은 그 정해진 모습이 없이 무수한 변화 그 자체였다. 상식이라 여겼던 '이것이 이렇게 생겨야만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가 지켜본 자연은 요술 숲과도 같았다고 했다. 최근 그의 작품 '물돌' '별-나무' 처럼 물과 돌, 별과 나무를 묶어서 제목을 쓰는 이유는 이들이 서로의 존재를 규정하기 때문이다.
"돌이 따로 있다면 거친 돌 그 자체였겠지요. 직경 1.5m의 돌들이 오랜 시간 파도에 치이면서 해변가의 몽돌처럼 동글동글 해졌어요. 결국 돌의 형상을 돌과 물이 함께 만드는 거죠. 별빛이 나무에 쏟아지는 것을 보면 나뭇가지들이 별을 향하는 것을 알 수 있어요. 그래서 그냥 나무라는 말은 사실 성립하지 않지요. 별나무, 빛나무, 바람나무처럼 같이 연결되어 있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도대체 이해할 수 없어요. 그래서 하이픈(-)으로 자꾸 연결해줘야 합니다."
제주 화가의 화두는 '시간'
4ㆍ3항쟁 연작부터 풍경화에 이르기까지 그의 작품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것은 '시간'이다. 그는 늘 사유한다고 했다. '인간에게 시간이란 무엇인가' '과거는 현재에 어떻게 드러나는가' '미래는 현재를 어떻게 형상화할 것인가'…. 그가 제주의 자연에서 주목하는 점도 장소에서 드러나는 누적된 시간의 흔적이다.
"다른 지역에서는 잘 보여지지 않는 돌담, 팽나무, 이끼 낀 바위에서 이들이 형성된 내력이 뚜렷이 보입니다. 마치 이 장소의 역사, 곧 장구한 시간이 풍경과 결합된 것처럼 보이죠. 제주도의 지질이나 화산활동, 용암이 흐른 궤적 같은 것을 보면 아주 오래 전의 땅의 생성까지 드러내고 있지요."
최근 제주가 세계 7대 경관에 선정된 것은 논란은 차치하고라도 그에겐 이해할 수 없는 일일 수밖에 없다. "삶의 공간을 놓고 단지 볼거리로 순위를 매기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요. 사막, 열대우림, 초원에까지 모든 역사가 온 천지에 가득 차 있잖아요. 장소라는 것이 그곳 땅 밟고 사는 사람들의 삶의 경험이 누적되고 역사가 숨쉬는 곳인데, 그것을 볼거리로 전락시키는 것을 이해할 수 없네요. 모든 관광에는 초대와 환대가 있습니다. 돈 때문에 초대를 하고, 환대하는 척하는 것에서 대등한 만남과 진정한 교류가 일어난다고 보지 않아요. 또 모든 것에 삶의 내용이 빠져있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강 화백은 장소에 시간이 켜켜이 쌓인 것은 '결'로 나타난다고 했다. 바람결, 물결처럼. 나무껍질이나 땅거죽에도 거친 결들이 살아있다. 시간은 결속에 숨어 있고, 결은 시간을 형상화한다.
"어릴 때 할머니가 등을 쓸어주면 할머니 손바닥이 거칠거칠하잖아요. 그 때문에 시원한 느낌도 들고. 할머니의 손길에도 결이 있는 거지요. 주름이 겹치면 결이 되는데, 그것은 금방 생기지 않고 시간을 필요로 하잖아요. 판소리하는 창자(唱者)의 목소리도 오랫동안 단련해야 성대가 거칠어져 득음을 하는 것처럼."
결은 시각적이기보다 촉각적인 것이다. "비단보다는 삼베같이 거칠거칠한 것이 좋다"는 강 화백은 시간이 촉각이 되는 순간을 캔버스 위로 잡아낸다. 결은 디지털 사진으로는 보여질 수 없는, 유화물감으로 두텁게 칠한 마티에르의 다른 말이다. 여기에 그는 '기운과 동세'를 불어넣어, 캔버스에 붓으로 터치하지 않고 일필휘지로 그려낸다. 파도를 그릴 때 세심하게 형태를 다듬어 가지 않고, 구긴 종이에 물감을 묻혀 캔버스에 풍랑을 거침없이 그려간다. 가까이에서 보면 검정과 하얀 색이 어지럽게 뒤섞인 형상이지만 거대한 캔버스 전체를 바라보면 시리고 거친 파도가 캔버스 밖으로 밀려나올 듯, 엄청난 기운을 뿜어낸다. 요즘은 아예 자연의 재료로 그림을 그리는 시도를 하고 있다. 돌로 돌하루방을, 솔가지로 소나무를 그리는 식이다.
"재료마다 질감과 소리, 경도가 다 다르지요. 그것이 물감과 만나 캔버스에 닿는 형상들 역시 다 달라요. 그래서 표현하려는 자연의 재료를 붓 삼아 그리면 개성적인 소리가 올라오죠. 물감을 넓고 섬세하기 바르기 위한 도구가 붓이지만 독특한 맛을 내는 것은 자연의 붓이에요. 모든 것을 붓자국으로 번역할 필요는 없거든요. 나중에는 만물로 하여금 네 스스로를 그려봐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
이인선기자 kelly@hk.co.kr
■ "난 여전히 민중미술가"
'민중미술가'로 알려진 강요배 화백은 20여년 전 제주로 내려간 후 줄곧 제주의 풍광만을 그려내고 있다. 구상화에서 벗어나 추상화처럼 변해가는 작품에서 그는 자연 속에 자신의 정서를 담아낸다. '제주민중항쟁사'를 그려 이름을 널리 알렸던 그의 작품에서 나타난 이런 변화를 두고 혹자는 "왜 민중미술을 하지 않는지" 궁금해한다.
"정치적으로 강한 메시지를 담고 있고 심지어는 선동적인 그림을 민중미술이라고 단순화한다면 전 그런 그림을 그리진 않습니다. 협소하게 국수주의적이고 민족주의적이라고 한다면 민중미술은 좋은 의미가 아니지요. 넓은 의미로 보자면 민중미술은 모든 것을 포괄합니다. 민중들의 발길이 닿고 삶의 터전과도 연결되는 산과 들판, 바다가 반 민중적일 리 없지 않습니까."
긴 정적 끝에 입을 뗀 그의 대답은 단호했다. 사실 그를 향한 이 같은 의문은 1980년대 민중미술가로 불렸던 많은 화가들이 작풍을 전환할 때마다 부딪치는 오해 아닌 오해다. 흔히 민중미술은 '1980년대 광주민주화운동의 무력진압과 제5공화국에 대한 저항이 사회적으로 확산되던 무렵 등장한 미술운동'으로 설명된다. 그러나 내막을 들여다 보면 민중미술이란 용어는 정부가 규정한 것으로, 정치적 탄압을 목적으로 사회 비판적인 메시지를 화폭에 담아낸 작가들을 손쉽게 그룹 지은 것이었다.
"정확한 의미로 쓴다면 민중미술가는 국민배우, 국민가수처럼 굉장히 영광스러운 호칭일 겁니다."
작품 속에 정치적 메시지를 강하게 드러내진 않지만 강 화백은 우회적인 방식으로 여전히 자신의 소신을 표출한다. 2005년 정부는 제주도를 '세계 평화의 섬'으로 지정ㆍ선포했지만 강정마을에 해군기지 건설을 추진해 섬이 몸살을 앓고 있다. 그는 밤새워 강정마을을 지키진 못해도 지난 6월 제주시 아트스페이스씨에서 열린 '강정마을회를 위한 기금마련 전시'에 작품을 쾌척하기도 했다. "해군기지 건설에 반대한다"는 그의 단언에서 제주를 오롯이 평화의 섬으로 가꾸고자 하는 속내가 전해졌다.
이인선 기자 kell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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