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살대로 끌려 가니까 저도 어쩔 수 없이 기분이 이상하더라고요. 총이 코 앞에 겨누어져 있고, 성질 급한 해적은 분을 못 참고 자신의 손목을 칼로 끊으면서 '소말리아에만 도착해 봐라. 네 손과 발은 이렇게 될 거다'고 난동을 부렸습니다. 선원들을 생각하면 흔들리면 안 됐는데 순간 '그냥 시키는 대로 할까' 하는 마음도 들었습니다."
5일 오후 서울 마포구 상암동 DMC첨단산업센터 내 영화창작공간 회의실에 긴장감이 흘렀다. 삼호주얼리호 석해균 선장이 올 초 소말리아 해적에게 6일간 납치됐던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하자 50여 명의 영화감독과 프로듀서들의 눈에서는 빛이 났다. 청중석에서는 한 마디라도 놓칠 새라 석 선장의 말을 받아 적는 컴퓨터 자판과 펜 소리만 들렸다. 석 선장이 영화 같은 이야기를 풀어낸 자리는 서울영상위원회가 영화창작공간에 입주한 영화감독과 프로듀서의 소재 개발을 위해 마련한 창작지원프로그램 강연이었다.
석 선장의 경험담은 이미 당시 삼호주얼리호 구출작전명을 딴'아덴만의 여명'이라는 제목의 영화로 만들어지고 있다. 해적과 대치한 긴박한 사투 상황과 석 선장의 영웅적 캐릭터는 영화계가 탐내는 소재이기 때문이다. 이날 강연에 참석한 '부당거래'의 여미정PD는 "삼호주얼리호 사건은 한국 사람이 주인공이면서 해외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서 대형 해양 액션물에 어울린다. 한국에서 쉽게 찾을 수 없는 소재이기 때문에 더욱 흥미롭다"고 말했다.
영화계의 관심을 대변하듯 강연 분위기도 뜨거웠다. 석 선장이 시간을 벌기 위해 해적들에게 "엔진이 고장났다"고 속여 배를 최대한 천천히 몰았던 일, 해적의 철통감시를 피해 지시 사항을 적은 쪽지를 선원들에게 전달했던 에피소드,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총알에 맞아 고통스런 상황에서 '여기서 정신을 놓으면 죽는다'고 생각하며 필사적으로 버텼던 긴박했던 순간들을 떠올릴 때 청중은 모두 숨을 죽였다.
1시간20분여의 강연이 끝나고 이어진 질의응답 시간에 영화인들의 관심은 "어떻게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상황에서 그런 용기를 낼 수 있었는지"에 쏠렸다. 석 선장은 "처음엔 마음의 갈등이 있었지만 불의에 어떻게든 대항해야 한다는 각오가 생기니 죽음도 무섭지 않았다"며 불굴의 의지를 보였다.
석 선장의 생생한 강연에 영화인들은 저마다 영감을 얻은 모습이었다. 이정수 감독은 "선원들을 지키려는 우직한 리더십을 봤다"며 "영화 속에서 이런 면을 잘 살리면 근사한 캐릭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미술관 옆 동물원'을 제작했던 이수정 프로듀서는 "석 선장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다른 선원들, 해적들의 이야기도 궁금해진다. 좀더 취재하고 상상해서 사건을 입체적으로 구성해 봐도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챔프'를 제작했던 정재승 프로듀서는 "석 선장이 위기 상황마다 기지를 발휘하는 단계들만 잘 살려도 흥미진진한 설정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약 2시간 동안 진행된 행사 후 석 선장은 "총을 맞은 당시에는 고통이 너무 심해 동료에게"차라리 날 쏘아 죽여달라"고 애원했지만 이렇게 회복하고 나니 살아남는 것이 나에게 주어진 운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2의 인생, 받은 은혜 갚으며 살겠다"고 말했다. 영화인들의 갈채 속에 지팡이를 짚고 퇴장하는 '아덴만의 영웅'의 모습은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박우진기자 panoram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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