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지평선] 빈자의 세금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지평선] 빈자의 세금

입력
2011.12.05 12:01
0 0

복권(福券)이 인류사만큼이나 오래됐다는 주장에 자주 인용되는 게 성경이다. 구약 에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르단 강변토지를 분배할 때 하나님이 ‘(사람)숫자대로 나누되, (위치는)제비 뽑기로’하도록 했다는 내용이다. 이대로라면 복권이라기보다는 추첨에 가깝다. 대신, 중국 한(漢)나라 초기에 시행된 것이 아마 오늘날과 같은 복권의 효시일 것이다. 숫자 대신 천자문에서 고른 한자 120개 중에서 10개를 맞히는 방식이었다. 숫자 맞히기 게임인 ‘키노(Keno)’의 의미가 중국식 로또(Chinese Lottery)인 까닭이다.

▦한나라의 키노가 만리장성 축조경비 마련을 위한 것이었듯, 복권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위정자가 택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재정마련 수단이었다. 직접세 인상이나 신설은 당장 체감효과로 인한 정치적 위험부담이 큰 때문이다. 주(州)마다 복권이 성한 미국의 경우 독립전쟁 지도자들부터 걸핏하면 복권에 의존했다. 벤자민 프랭클린은 전쟁에 필요한 대포 구입을 위해, 조지 워싱턴은 버지니아 도로 건설에, 토머스 제퍼슨은 부채 탕감을 위해 복권을 운용했다. 예전 우리의 대표복권들인 애국복권, 주택복권, 올림픽복권 등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복권은 서민의 슬픈 희망을 악용하는 가장 질 나쁜 형태의 조세다. ‘빈자(貧者)의 세금’으로 불리는 이유다. 미국 통계에 따르면 저학력, 저소득층일수록, 또 유색인종일수록 더 많이 복권을 사는 것으로 나타났다. 불황으로 생활이 어려워질수록 복권판매액이 급증하는 현상도 같은 맥락이다. 주로 빈자의 호주머니를 털지만 그렇다고 해서 행운이 빈자에게만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도 비극이다. 지난달 말 미국 코네티컷주의 파워볼복권 사상 최대 당첨금인 2억5,400만 달러(약 2,900억 원)를 찾아간 이들은 월가의 고위 금융인 3인이었다.

▦올해 국내복권의 총매출액이 지난달까지 2조8,000억 원에 도달, 사행산업통합감독위원회가 판매 중단을 권고하고 나섰다. 이대로 가면 감독위의 연간 발행한도 권고수준을 넘어 연말까지 3조 원을 크게 상회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역시 불황 탓이다. (나눔)로또의 1등 확률 814만분의 1, 연금복권 315만분의 1이 벼락맞을 확률보다 낮다는 얘기도 일상에서 다른 희망 찾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는 현실 앞에선 부질없다. 조지 오웰이 에서 일찌감치 간파하지 않았던가. 복권이란 게 노동자들을 바보로 만드는 진통제임을.

이준희 논설위원 junle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