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의 탄생/송호근 지음/민음사 발행·432쪽·2만5000원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무상급식 논쟁처럼 우리 사회에 합의가 안 되는 사항들이 많잖아요. 이런 갈등이 왜 생길까 하는 문제의식이 있었죠. 제 결론은 우리나라의 공론장은 만들어질 때부터 발생론적 결함을 갖고 있다는 겁니다."
송호근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인민의 탄생> 을 쓰게 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소통 부재의 시대, 공론장이 순기능을 하지 못하는 현실에 답답해하던 그는 '미국산 사회과학'을 벗어 던지고 우리의 뿌리인 조선 개화기 인민의 탄생부터 분석했다. 신간은 지난 4년간의 연구를 대중의 눈높이에 맞춰 소개한 책이다. 인민의>
1일 만난 송 교수는 "국내 출간된 사회과학서의 70,80%는 서구식 콘텐츠를 그대로 쓴 것"이라며 "거푸집(연구방법론)은 서구 것을 갖고 오되, 콘텐츠를 우리 것으로 채우려고 했다"고 말했다. 책은 '인민은 시민으로, 담론장은 공론장으로' 진화했다는 서구식 모델을 기준으로 중세, 근대 조선의 면면과 여기서 태동된 국내 시민사회의 특징을 분석한다.
송 교수는 조선 500년 사회를 유지한 기반은 성리학이며 성리학은 그 자체가 종교이자 정치, 지식이었다고 말한다. 이 구조를 마르크스주의 학자 알튀세르의 용어인 '국가이데올로기 기구(ISAsㆍideological state apparatuses)'에 빗대며 정치ㆍ종교ㆍ지식의 삼중 구조가 인민을 신분 질서에 포박시키며 조선의 견고한 통치 체제를 만들었다고 분석한다.
이 체제가 무너지는 계기가 한글의 탄생이다. 조선시대 평민과 천민을 합쳐 일컬은 '인민'은 통치의 객체이자 대상이었지만, 한글은 스스로 읽고 쓰고 생각할 줄 아는 '새로운 인민'을 출현시킨다. 그로 인해 인민들의 소규모 토론 공간인 담론장이 형성된다. 1860년대 동학농민운동을 기점으로 사회를 바꾸려는 인민의 자발적 결사체가 400∼500개에 이르는 등 인민은 공익을 염두에 둔 '시민'으로 변모한다. 각자의 계층적 이익을 논의했던 담론장은 사회 공공적 가치를 나누는 거대한 '공론장'의 모습을 갖춰간다.
하지만 이렇게 형성된 시민, 공론장은 일제 강점기를 겪으며 반쪽짜리 시민과 공론장으로 그치고 말았다는 것이 송 교수의 진단이다. 그는 "서구의 공론장은 근대 부르주아로부터 형성됐는데, 조선에는 서구식의 부르주아가 없다. 우리 사회 공론장 결함의 핵심은 부르주아에서 촉발된 교양시민이 없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때문에 "현재 한국은 합의의 토대가 되는 공유가치의 면적이 좁고, 합의를 주도할 '교양시민'이 결핍돼 공론장에 균열이 생겼다"는 것이다.
그는 이 균열의 해결책을 하버마스의 공론장 이론에서 찾는다. 나치즘, 파시즘 등 인간 광기에 대한 해결책을 의사소통을 통한 시민적 합의에서 찾은 하버마스의 이론은 낙관적 전망이란 비판에도 불구하고 근대 시민사회의 방향성을 제시한 탁월한 이론으로 자리잡았다.
하버마스의 공론장 이론이 시민들의 '면대면(面對面)' 의사소통을 기본 전제로 하기 때문인지, 송 교수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대안 공론장이 되기엔 아직 이르다고 전망했다. 여과기능 없는 온라인 공간의 대화는 개화기 인민들이 소문을 공유하는 과정에서 소문에 살을 붙이고 극적 요소를 보탠 것 같은 현상일 뿐이며 자기검열의 과정을 겪도록 "내버려 두어야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분석은 흥미롭지만, '인민은 진화한다'(39쪽)는 계몽주의 관점과 서구식 잣대로 한국사회를 '반쪽짜리 공론장'으로 진단했다는 비판의 여지는 남는다. 송 교수는 "그런 혐의에서 아주 자유롭지는 못하다"면서도 "하지만 근대라는 보편적 일반적 기준에서, 우리만의 고유한 근대란 무엇인가?"라고 되물었다. "근대란 기준에서 우리 사회는 시민적 동력을 내면화하지 못하고 공공선에 대한 자기검열이 없었다는 것이고, 이 현상의 심층을 알면 공론장의 결함을 줄일 수 있다는 거죠."
송 교수는 이 책의 후속으로 인민이 시민으로 바뀌어가는 과정을 담은 2권 <시민의 탄생> 과 20세기 국내 시민 공론장의 결함을 분석한 3권(제목 미정)을 통해 한국 시민사회의 기원을 분석할 계획이다. 시민의>
이윤주기자 mis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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