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모인 분들 중 절반 가량이 제가 한국에 온 후에 입단한 분이네요. 어느새 세월이 이렇게 흘렀군요. 많이 보고 싶을 거예요. 중국에 꼭 놀러 와요. 거기서도 바둑 같이 연구해요. 우리 귀여운 여자 기사들을 위하여~" . 지난 달 30일 저녁 왕십리 한국기원 부근 음식점에서 열린 환송회에서 후배 여자기사들에 둘러싸여 이별의 술잔을 들고 건배를 제의하는 '철녀' 루이나이웨이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세계 최강 여자 기사인 루이나이웨이(芮乃偉ㆍ49)와 장주주(江鑄久ㆍ50) 부부가 12년 8개월간의 한국 생활을 접고 이번 달에 중국으로 돌아간다. 중국기원과의 불화로 1990년 고국을 떠나 일본 미국 등 객지를 떠돌던 '바둑 집시' 시절까지 합치면 무려 21년만의 화려한 귀향이다.
루이나이웨이 부부는 1999년 4월부터 한국기원 객원기사 자격으로 프로 기사 생활을 시작했으며 2001년 5월부터는 내국인과 똑같이 한국기원 소속 기사로 승격했다. 루이는 지난 달 30일 열린 제 17기 GS칼텍스배 예선에서 이호범과의 대국을 마지막으로 한국에서의 공식 기전 일정을 모두 마치고 여자 기사들과 저녁을 같이 하며 석별의 정을 나눴다.
647전 409승 238패, 승률 63.2%. 루이가 한국기원 기사로 12년 8개월간 활동하면서 거둔 성적이다. 그동안 여섯 차례나 여류 기전을 싹쓸이 한 것을 비롯, 여류 기전 27회 우승을 포함해 모두 29개의 타이틀을 품에 안았다. 남편 장주주의 맥심배 우승까지 포함하면 부부가 30회 우승 기록을 세웠다. 특히 2000년 제 43기 국수전에서 조훈현에게 도전해서 국수타이틀을 따내 여자 기사가 일반 기전에서 우승하는 전무후무의 기록을 수립했고 2003년 제 4회 맥심배선 세계 최초로 부부가 결승에서 맞대결을 펼쳐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한국 여자 바둑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루이가 한국에 오기 전까지 중국과 일본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세를 보였던 한국 여자 바둑계는 루이를 맞아들이면서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해 최근에는 세계 최강 수준으로 올라섰다. 그동안 단 한 번도 세계 대회서 우승하지 못 했던 한국 여자 기사들이 루이가 한국에서 활동한 이후 무려 열 차례(개인전 6회, 단체전 4회)나 세계 정상을 정복했다.
루이는 얼마 전 중국 우한에서 열린 제 2회 지력운동회에 고향 상하이팀 대표 선수로 출전해 단체전 우승, 개인전 준우승을 했다. 이 때 중국기원으로부터 '돌아오겠다면 환영한다'는 뜻을 전달받고 숙고 끝에 귀향을 결정했다고 한다. 내년부터 상하이기원 소속으로 활동하면서 베이징에 있는 국가 대표 기숙사에서 후배 기사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바둑 공부를 할 계획이다.
루이 부부는 "한국에서의 12년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라며 "한국기원과 한국기사, 한국 바둑팬들에게 진심으로 감사 드린다. 기회가 닿는 대로 한ㆍ중 양국의 바둑 교류 증진을 위해 작은 힘이나마 보태고 싶다"고 말했다.
_오늘 낮에 한국에서의 마지막 공식 대국을 마쳤다. 소감 한 마디.
"이제 드디어 고향에 돌아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한편으론 기쁘지만 그동안 정들었던 한국을 막상 떠나려니 서운하다. 마지막 대국을 승리로 장식하지 못해서 조금 아쉽지만 실력이 부족한 탓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_갑작스런 귀향 소식에 한국의 바둑팬들이 많이 섭섭해 한다.
"전부터 조금씩 생각해 온 일이다. 나도 내년이면 쉰 살이다. 점차 나이가 들면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커지고 연로하신 부모님도 보고 싶어서, 한국을 떠나는 게 많이 아쉽지만 그렇게 결정했다. 앞으로 삼성화재배나 LG배 등 세계대회 통합 예선에는 반드시 출전할 테니 그 때 다시 한국 팬들을 뵐 수 있을 것이다."
_앞으로 부부가 함께 중국에서 프로 기사로 활동하는가.
"나는 상하이기원 소속이지만 베이징에 있는 중국 국가 대표 기숙사에서 젊은 후배 기사들과 함께 생활하며 좀더 바둑 공부를 할 계획이다. 남편은 프로 기사로 활동하지 않고 상하이에서 어린이들을 지도한다. 이미 3개월 전에 상하이 시내에 '장루이웨이치(江芮圍棋)'라는 바둑 교실을 열었다. 현재 학생이 90명 정도 된다."
_한국에서 부부가 항상 실과 바늘처럼 붙어 다녀 눈길을 끌었다. 남편과는 언제 어디서 만났나.
"내가 1980년 베이징 국가 대표팀에 들어간 후부터 자주 보게 됐다. 여러 해 동안 가까이 지냈지만 별로 특별한 감정은 없었다. 그러다 1987년 내가 저지른 사소한 잘못에 대해 중국기원이 전국 대회 출전금지라는 가혹한 징계를 내려서 매우 슬徘構?있을 때 남편이 다가와 따뜻하게 위로해 줘서 좋은 감정을 갖게 됐고 그 때부터 사랑이 싹 텄다."
_결혼은 일본에서 했는데.
"중국에서 더 이상 바둑을 두기 어려워져 1990년 남편은 미국으로, 나는 일본으로 떠났다. 중국에 함께 있을 때는 그저 그랬는데 막상 헤어지고 나니 서로 애틋한 마음이 깊어졌다. 1992년 제 2회 응씨배 세계대회가 도쿄에서 열렸는데 두 사람이 모두 초청받았다. 그 기회를 이용해서 서둘러 결혼 신고부터 했다. 정식 부부가 돼야 내가 미국 비자를 발급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결혼식도 못 했고, 물론 결혼 사진도 없다. 린하이펑연구회서 동료들과 함께 축하 케익 자른 게 전부다. "
_한국에는 어떤 계기로 들어오게 됐나.
"일본에서 프로로 활동해 보려 했으나 전혀 가능성이 없어 결혼 후 미국으로 건너 갔지만 거기서도 역시 마찬가지, 한 번도 바둑다운 바둑을 접하지 못했다. 그 때 차민수 사범을 만나 친하게 지냈다. 차 사범이 우리 사정을 듣고 한국에서 활동할 수 있게끔 큰 힘을 써주셨다. 스승인 우칭위엔 선생과 동문으로 내게는 사숙뻘이 되는 조훈현 사범님의 도움도 컸다. 그래도 여러 해 동안 이런저런 사정으로 최종 결정이 미뤄지다가 마침내 1999년에 한국기원 기사회 투표를 거쳐 이사회까지 통과됐다는 소식을 차사범님으로부터 전해 들었다. 너무 너무 기뻤다. 평생 그 때보다 더 기뻤던 적은 없었다. 비자가 나오자마자 곧바로 한국으로 날아 왔다."
_한국 생활 중에 기억에 남는 일도 많았을 텐데.
"그토록 두고 싶었던 바둑을 마음껏 둘 수 있었기에 12년 8개월간 하루 하루가 모두 즐겁고 행복했다. 2000년 국수전 도전기에서 조훈현 사범님을 이기고 우승한 게 크게 기억에 남지만 실은 그에 앞서 본선에서 이창호를 이기고 도전권을 따냈을 때 가장 기뻤다. 반면 같은 해 제 5회 삼성화재배 8강전에서 야마다 기미오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했던 바둑을 역전패한 건 지금 생각해도 너무 분하다. 나중에 검토해 보니 무려 17번이나 이길 찬스가 있었다. 그 때문에 남편에게 오랫동안 '바보'라고 야단 맞았다."
_특히 공격적인 기풍으로 유명하다.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
"내가 원래 계가를 잘 못한다. 실리 바둑이 자신 없다. 그래서 가능하면 싸움을 해서 확실히 우세를 굳히고 싶어 한다. 그러다 보니 종종 역전패도 잘 당한다."
_최근 한국 여자 바둑의 비약적인 성장에 루이 사범의 역할이 컸다는 평인데.
"과찬이다. 함께 연구하고 시합하며 오히려 내가 많이 배웠다. 한국은 환경이 좋고 재능 있는 기사가 많아 노력하면 누구나 강해질 수 있다. 박지은ㆍ조혜연을 비롯, 요즘 입단한 최정예에 이르기까지 훌륭한 기사들이 많다."
_현재 여자 기전 3개 타이틀을 모두 보유 중이다. 이 가운데 여류명인전은 도전기로 진행되는데 퇴직하면 도전기는 어떻게 되나.
"11월 30일자로 퇴직원을 냈으니 곧 처리가 될 것으로 안다. 여류명인전은 내년에 도전기를 치르도록 돼 있는데 이미 퇴직을 했으므로 자연히 타이틀 반납이 되는 셈이다. 내년 1월부터 중국에서 프로 기사로 활동하려면 올해 안에 그 쪽에 복직 신청서를 내야 하기 때문에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 혹시나 그 때문에 기전 진행에 차질이 빚어진다면 그저 죄송스러울 뿐이다."
_끝으로 한국팬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한국과 한국 기사, 그리고 바둑 팬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여러분들의 보살핌과 사랑이 있었기에 오늘의 제가 있는 것입니다. 저희를 받아주시고, 활동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신 따뜻한 마음을 평생 간직하고 살 겁니다. 저희가 한국에 오지 못했다면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지 상상조차 전혀 할 수 없읍니다. 아마도 바둑과 영영 이별했을 지도 모릅니다. 인생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덧붙여 다시 복귀를 허락해준 중국기원에도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앞으로 한국과 중국이 바둑으로 더욱 좋은 관계를 맺는 데 작은 힘이나마 보탤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박영철 객원 기자 indra361@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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