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성실하다는 말로 충분할까. 아직 본격 성장 궤도에 오르지 못한 한국 뮤지컬계에서 1,000석 이상 규모의 대형 뮤지컬이 1,000회까지 공연을 이어가기도 어렵지만 한 배우가 그 무대에 한번도 빠짐 없이 서는 일도 쉽지 않은 일이다. 배우의 성실함과 실력은 물론, 제작사와 배우 사이의 신뢰 등이 뒷받침돼야 할 터. 아니나 다를까. 10일로 공연 1,000회를 맞는 뮤지컬 '맘마미아'의 '개근 배우' 성기윤(40)에게는 특별한 소신이 있었다. 그는 주인공 도나의 상대역인 샘과 빌리 역으로 980회 이상 무대에 서왔다.
"언제부턴가 '맘마미아' 공연 일정이 잡혔다는 소식을 들으면 제작사의 요청이 없어도 다른 공연 출연 제안을 거절하게 됐어요. 개근 배우 타이틀에 집착한 셈인데, 새 것에만 열광하는 지금 공연계 분위기에서 든든한 버팀목이 될 대형 뮤지컬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또 꾸준히 출연하며 작품을 안정적으로 떠받치는 배우의 존재도 중요하죠."
1991년 '캣츠'의 앙상블로 데뷔해 '렌트' '시카고' 등 배역의 크기를 가리지 않고 꾸준히 활동해 온 그에게 2004년 시작한 '맘마미아'는 주종목으로 삼고 싶은 작품이다. "단역 오디션을 봤다가 덜컥 생각지도 못한 주연급 샘에 발탁됐죠. 30대 중반 나이에 20대 주인공 소피의 아버지 역할을 하면서 연기의 폭을 확 넓힐 수 있었어요. 해가 바뀌며 계속되는 재공연을 통해 배역과 제 나이가 가까워지면서 인생을 함께 배울 수 있는 공연이기도 했고."
이전까지 앙상블 활동을 주로 해 온 그는 '맘마미아'의 주역을 꿰차면서 몸값도 올랐다. "초연 때 3개월 출연 계약을 하는데 출연료가 그 전 해 연 수입과 맞먹더군요. 계약서 쓰고 나오면서 이제껏 뭘 했나 싶어 순간적으로 화도 좀 났어요. 연기를 일로 생각하지 않겠다 다짐했던 저였는데…. 그래서 '맘마미아'는 '내가 하는 연기는 돈으로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값진 것'이라는 생각을 품게 한 공연이기도 해요."
배우 경력 20년째에 접어드는 그는 "내 욕심보다 내가 속해 있는 이 세계의 방향에 대한 생각이 더 많다"고 했다. "제 또래 배우 중 단역부터 주역까지 차곡차곡 단계를 밟아 온 사람이 많진 않아요. 이 상태에서 다른 길로 가면 후배들은 누굴 보고 꿈을 꿀까, 하는 책임감이 듭니다."
그가 지금껏 가장 길게 쉰 것은 고작 한 달 정도다. 그만큼 쉴새 없이 달려 왔지만 공연 포스터에 적힌 자신의 이름이 점점 뒤로 처지는 것에 오기가 났던 20대 시절도 있었다. "해답은 항상 객관적으로 바라볼 때 나오는 법이죠. 제작자, 연출자의 입장에서 생각하기 시작하면서 꼭 주연을 해야 한다는 욕심을 버렸어요. 제가 뭐 여심을 흔드는 배우도 아니고."
"스스로에게 냉정하다"는 그는 1,000회 공연을 앞두고 있지만 만족스러웠던 공연은 다섯 손가락 안에 꼽는다고 했다. 무대에 오르면 오를수록, 책임져야 하는 부분이 어디까지 인지 알면 알수록 긴장이 되기 때문이란다.
'맨 오브 라만차'의 돈키호테를 꿈의 배역으로 꼽는 그는 "하지만 지금의 뮤지컬 환경에선 어떤 사람이 모여 어떤 작품을 만드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지금 뮤지컬에 집중된 큰 관심은 기현상이에요. 제대로 단계를 밟아 성장하려면 아직 갈 길이 멀죠. 1,000회 넘게 공연되는 대형 뮤지컬과 저 같은 개근 배우가 특별한 일이 아닌 날이 빨리 와야죠."
김소연기자 jollylif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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