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달 1일 '세계 에이즈의 날'을 1주일 앞둔 24일 오후 6시 반 이화여대 근처 한 패션콘돔판매점. 안으로 들어서자 수십 종의 콘돔이 반긴다. '군대 때 추억을 되살릴 수 있어 일석이조'라 광고하는 콘돔은 겉포장을 이등병, 일병 등 군대 계급장으로 위장했다. 그 옆에 화투, 트럼프, 담뱃갑인 척하는 콘돔도 여럿이다.
'골라먹는 재미'가 있다는 종합과일콘돔 세트는 콘돔 치고는 패션 스타다. 딸기향 콘돔은 핑크색, 멜론향 콘돔은 초록색으로 '깔맞춤'까지 했다. 패션콘돔을 애용한다는 대학생 김모씨는 "콘돔 하면 부끄러운 물건이라 여기기 쉬운데, 톡톡 튀는 아이디어 덕에 선물 받은 친구들도 재미있어 한다"고 말했다.
은밀한 부위를 감싸 '장화'라고도 불리는 이 수줍은 물건의 역사는 중세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에는 물고기 껍질, 염소 방광, 양의 내장으로 콘돔을 만들었다. 올해 6월 스페인에선 200년 전 돼지 창자로 만든 콘돔이 발견됐다. 오늘날에는 고무나무 수액에서 얻은 천연고무(라텍스)로 콘돔을 만든다. 질 좋은 고무는 콘돔, 의료용 장갑에 쓰고 질이 떨어지는 건 타이어 등을 만드는 데 사용한다.
하루살이보다 짧은 삶을 사는 콘돔이지만 세상에 나오기까진 엄격한 과정을 거친다. 유리로 만든, 남성 성기 모양의 주형 수백 개를 액체 상태의 천연 고무에 두 번 담갔다가 빼면 콘돔 모양이 만들어진다. 포장지로 싸기 전까지 10차례 이상 품질 검사를 받는다.
그중 핵심은 콘돔에 미세한 구멍은 없는지 살피는 일이다. 스테인리스 봉에 콘돔을 씌우고 전기가 흐르는 물에 담가 불량품인지 확인한다. 고무인 콘돔은 전기가 통하지 않는 절연체다. 하지만 콘돔에 아주 작은 구멍이라도 있으면 스테인리스에 물이 닿아 전기가 통하기 때문에 불량품인지 바로 알 수 있다. 국내 최대 콘돔 생산업체 유니더스의 박재홍 과장은 "구멍 난 콘돔이 있을까 봐 두 개를 겹쳐 쓰는 분도 있다던데, 일일이 검사하기 때문에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된다"고 말했다.
매년 전 세계에서 생산하는 콘돔의 수는 120억 개. 전 세계 인구보다 2배 많다. 유니더스만 해도 하루에 콘돔 213만개를 만든다. 한 달이면 6,400만개, 1년이면 7억 6,800만개다.
고무를 길게 해 돌돌 말아놨다고 다 콘돔이 되는 건 아니다. 국제표준화기구(ISO)의 인증을 거쳐야 한다. ISO에선 공기 18리터, 물 20리터 이상 넣어도 이상이 없을 때 콘돔이란 이름을 허한다. 유니더스에서 만든 콘돔은 물 30리터가 들어간다. 길이 20㎝ 남짓한 콘돔에 1.5리터 페트병 20개에 담을 물이 들어간다는 얘기다. 박 과장은 "콘돔은 양 손으로 잡고 늘려도 2m 이상 거뜬히 늘어난다"며 "성관계 도중 콘돔이 찢어졌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우스갯소리"라고 했다.
최근엔 다이어트를 거듭하고 기능성까지 갖췄다. 안전하면서도 만족스러운 성관계를 위해서다. 이제껏 나온 제품 중 가장 날씬한 콘돔은 두께가 0.02㎜로, 고분자화합물인 폴리우레탄으로 만들었다. 천연 고무를 쓴 것 중에는 두께가 0.03㎜인 게 제일 얇다. 벤조카인이란 국소마취제가 들어있는 콘돔은 일반 콘돔보다 두 배 비싸지만 꾸준히 인기다. 치과 진료나 조루 치료에 쓰는 이 물질은 좀 더 오래 성관계를 할 수 있게 돕는다. 그러나 최근 미국 식품의약국(FDA)은 벤조카인이 심각한 빈혈을 일으킬 수 있다고 경고했다.
국내에선 보기 힘들지만 여성용, 남성 동성애자용 콘돔도 있다. 여성용 콘돔은 여성 몸 안에서 정자의 길목을 막는다. 남성 동성애자용 콘돔은 두께가 0.09㎜로 두껍다는 게 특징이다.
전 세계 콘돔 가운데 30% 이상이 한국산이지만 정작 국내 콘돔 사용률은 매우 낮다. 성감(性感)을 떨어트린다는 이유에서다. 질병관리본부에 따르면 일시적인 상대와 성관계할 때 콘돔 사용률은 23%로, 스웨덴(43%), 캐나다 퀘벡(40%) 등과 크게 차이난다. 의료용 장갑과 마찬가지로 엄연한 의료기구임에도 피임기구라는 반쪽 인식에 그치는 것도 문제다. 이윤수 한국성과학연구소장은 "에이즈, 매독 등 성병에 관한 인식을 키우고, 콘돔을 챙겨서 다니면 문란하다고 여기는 시선을 개선해야 한다"고 말했다.
변태섭기자 libertas@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