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이 22일 한나라당의 기습 행동과 이를 저지하려는 한 야당 의원의 최루탄 투척 속에서 처리된 뒤 여야 정치권이 대국민 사과를 쏟아내고 있다. 여야는 "국익을 위해 불가피한 선택"(한나라당) "기습 처리를 막지 못해 죄송하다"(민주당∙민노당) 등 유감을 표시하며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이들의 사죄가 얼마만큼 국민들의 마음을 울릴지는 의문이다.
한나라당의 태도는 사과라기 보다는 변명에 가깝다. 정치적 이유로 반대를 일삼는 야당 때문에 여당의 기습 처리가 불가피했다는 논리로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 김기현 대변인은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야권연대에서 주도권을 행사하고 정치쇼를 통해 내년 선거에서 이기겠다는 민주당의 의도 때문에 국가이익이 좌절될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한나라당은 그러면서 민주노동당 김선동 의원의 최루탄 투척을 최악의 국회 폭력사태로 규정하고 목소리를 높여 성토하고 있다. 그런다고 해서 한나라당의 기습 처리 행동이 가려지는 것은 아니다. 설령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그야말로 얄팍한 '꼼수'다.
그간 초조해 하면서 국회를 향해 한미 FTA 비준동의안 조속 처리를 주문해왔던 청와대는 한술 더 떴다. 한미 FTA 비준안이 처리된 직후 "어려운 과정을 거쳤지만 한미FTA가 비준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다"는 공식 입장을 밝혔다. 또 "오랫동안 한미FTA 비준을 위해 애써온 의원 여러분께 감사한다"며 한나라당을 격려했다.
정국 운영의 책임을 진 청와대와 한나라당은 "국익이 걸린 한미FTA가 여야의 원만한 합의 속에 처리되지 못한 것이 아쉽고 국민들에게 죄송하다"는 사과 입장을 먼저 밝혔어야 한다.
민주당과 민주노동당의 지도부는 23일 울분과 비탄이 가득 찬 표정으로 무릎을 꿇었다. 양당 지도부 모두가 한 사과의 말은 "한나라당의 기습 처리를 막아내지 못해 죄송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과 내용은 달랐어야 했다. 한미FTA 협정이 타결된 것은 4년 7개월 전인 2007년 4월이었다. 그 동안 한미FTA의 실체를 국민들에게 알리고 반대하도록 설득해내지 못한 자신들의 무능력을 우선 뉘우쳐야 한다. 과거 정권에서 한미FTA를 찬미했던 손학규 대표, 김진표 원내대표, 정동영 최고위원 등 민주당 지도부가 왜 지금은 이를 반대하는지 궁금해 하는 국민들이 여전히 많다. .
민주노동당은 무엇보다 김선동 의원의 최루탄 투척 행위에 대해 사죄해야 한다. 그의 행동은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서는 의회에서의 폭력 행사도 가능하다는 지극히 위험한 생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것이다. 김 의원은 "저의 솔직한 심정은 폭탄이라도 있으면 일당독재 국회를 폭파시켜버리고 싶다"고도 했다. 이정희 대표는 그런 그를 "당 대표로서 자랑스럽다. 윤봉길 의사였다, 안중근 의사였다, 이렇게 생각한다"고 감쌌다.
폭력을 써서라도 자신의 신념을 지켜야 한다는 민주노동당 일부 의원들의 인식이 과연 의회민주주의 체제와 양립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갖게 한다. 그런 인식이 조금이라도 용인된다면 좌우 극단주의 세력들의 의회 폭력 가능성을 차단하기가 쉽지 않다.
국민은 앞날에 막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한미FTA 비준을 최루탄 가루의 난장판 속에 처리하며 세계적인 구경거리로 만든 정치인들 때문에 다시 한번 참담함과 좌절감을 느끼고 있다. 무릎을 꿇었지만 책임을 떠넘기고 진정성을 찾을 수 없는 그들의 사과는 기성 정치에 대한 국민의 염증만 키울 뿐이다. 그렇게 되면 내년 총선에서 새 정치 바람이 더욱 거세게 불게 될 것이다.
김동국 정치부 차장 dk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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