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에 우리 가족은 서울 동숭동 대학로의 한 개그 공연을 보러 간 적이 있다. 대부분 20, 30대였고 40대는 우리 부부뿐이었다. 공연 시작 전 한 개그맨이 나와 "10대 있느냐"고 물었고 세 아들이 손을 들자 "낙엽만 굴러가도 웃는 좋은 친구"라고 치켜세웠다. 20, 30대에 대해서도 덕담을 던진 후 "혹시 40대도 계시냐"고 물었다. 우리 부부가 자랑스럽게 손을 들었더니 그는 "환불해줄 테니 나가실래요"라고 했다. 이유를 물었더니 "40대는 즐기지 않고 분석하려 들기 때문"이라고 했다. 순간 폭소가 터졌고 우리도 웃었다.
■ "즐기기보다 분석한다"는 그의 말은 지금 생각해도 압권이다. 그날도 끝까지 자리를 지켰지만, 시종 깔깔거리는 아들들과는 달리 연기력이나 짜임새를 이리저리 분석했던 것 같다. 며칠 전 영화 <헬프> (The Help)를 봤을 때도 그랬다. 흑인 인권운동이 치열하게 벌어졌던 1960년대, 흑인 가정부들의 억압된 삶과 그들의 눈을 통해서 본 미국사회의 모순이 잘 그려진 수작이었다. 그럼에도 영화에 푹 빠지기보다는 <미시시피 버닝> <칼라 퍼플> <말콤x> 등 흑인인권을 다룬 다른 영화들과 비교하는 나를 발견하고선 멋쩍게 웃었다. 말콤x> 칼라> 미시시피> 헬프>
■ 이런 습성 탓에 신문사에 와서도 그냥 있지 못하고 영화담당 기자에게 감상평을 물었다. 그는 의외로 후한 평점을 주지 않았다. 보수적인 백인 부부가 거리의 흑인 소년을 입양해 훌륭한 미식축구 선수로 키운다는 <블라인드 사이드> 를 거론하면서, <헬프> 도 선한 백인(작가 지망생 스키터)의 역할이 흑인 가정부들의 자각과 용기를 일깨운다는 구도가 못마땅하다고 지적했다. 당시의 흑백차별이 실제보다 훨씬 부드럽게 묘사된 것 같다는 느낌도 덧붙였다. 백인 작가가 전하는 할리우드식 휴머니즘이 아닌 흑인 가정부가 직접 쓴 <헬프> 를 보고 싶다는 얘기였다. 헬프> 헬프> 블라인드>
■ 아내의 평도 들어봤다. 전체적인 분석은 비슷했지만, 왕따를 당하는 한 백인 여성이 흑인 가정부의 도움으로 우울증을 극복하는 대목이 인상적이었다는 또 다른 후기를 내놓았다. 아내는 '유학까지 다녀온 모범생이 치의학대학원을 가라는 부모의 강요에 자살했다'는 이웃의 슬픈 사연을 전하며 "속마음을 털어놓을 단 한 명의 친구라도 있다면 세상은 살 만하다고 영화가 외치더라"고 했다. <헬프> 는 하나지만, 보는 사람에 따라 이런 <헬프> , 저런 <헬프> 가 있었다. 분석을 하든 즐기든 온 가족이 영화라도 한 편 보기를 권하고 싶은 늦가을이다. 헬프> 헬프> 헬프>
이영성 논설위원 leey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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