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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인권위의 약속, 그 후 10년/ (상) 세상을 바꾼 주요 결정 10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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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인권위의 약속, 그 후 10년/ (상) 세상을 바꾼 주요 결정 10선

입력
2011.11.23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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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년 국보법 폐지 권고' 인권위 최고의 결정으로 꼽아

"이 법은 국가인권위원회를 설립하여 모든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보호하고 그 수준을 향상시킴으로써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실현하고 민주적 기본질서의 확립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국가인권위원회법 1조 1항)

2001년 11월 25일, 국가인권위원회는 인권위법 1조 1항의 목표를 향해 출범했다. 하지만 모든 이의 인권을 보호하겠다던, 더 향상시키겠다던 인권위의 10년 전 약속이 최근 들어 공수표가 되고 있다는 비판이 거세다. 25일 10주년이 되는 인권위 기념식에 전 위원장 4명이 모두 불참하는 것도 인권위의 현주소를 말해주는 방증이다.

지난 10년간 인권위 안팎에서 지켜본 전문가 5명으로 구성된 자문단이 우리사회를 변화시킨 인권위 결정과, 처음의 약속을 저버린 결정을 각 10개씩 선정했다. 선정 자문단은 김형완 인권정책연구소 소장, 명숙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박찬운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정연순 변호사, 홍성수 숙명여대 법학부 교수.

최고의 결정 10선

5명의 자문단이 만장일치로 꼽은 인권위의 최고 결정은 국가보안법 폐지 권고(2004년). 유엔 자유권규약위원회 등 국제사회가 "국보법은 개인의 양심과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며 수 차례 폐지를 권고했지만 정작 국내에서는 논의가 되지 않던 시절 인권위가 폐지를 권고하며 이슈화를 선도했다는 평가다.

매년 700~800여명의 젊은이가 실형을 선고 받는 양심적 병역거부자 문제 역시 국제사회가 인권 침해로 규정했으나 국내에서는 진지한 논의가 없었던 사안이다. 그러나 인권위가 양심적 병역거부 인정 및 대체복무제 입법을 권고(2005년)하면서 정부의 대체복무제 도입 결정을 끌어냈다. 물론 정권 교체 후 전면 유보된 상황이지만 대체복무 논의의 기틀을 닦는 계기가 됐다는 평가다. 사형제 폐지 의견 표명(2005년) 역시 1998년 이후 사실상 중단된 사형제가 앞으로는 완전히 폐지될 가능성을 열었다.

인권위가 3년에 걸쳐 23개 분야의 국내 인권실태를 조사한 후 정부에 국가인권정책 기본계획(NAPㆍNatianal Action Plan)을 수립하도록 권고(2006년)한 것 역시 중요한 성과 중 하나다. 박찬운 교수는 "과거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통해 경제를 발전시켰듯 NAP는 정부가 인권 증진을 위해 나아가야 할 구체적인 방향을 제시한 틀"이라며 "아시아 국가 중 최초의 NAP 수립 권고이기도 해 굉장히 의미가 크다"고 평가했다.

굵직한 정책 권고 외에도 개별 진정 사건 결정이 인권 의식을 바꾼 경우도 많았다. 2002년 5월 서울 지하철 5호선 발산역에서 휠체어리프트를 이용하던 지체장애인이 추락해 사망한 사건을 인권위가 조사, 개선을 권고하면서 장애인 이동권 문제가 처음으로 공론화했다. 서울지검 피의자 고문치사 사건(2003년)은 인권위가 처음으로 검찰에 대해 조사권을 발동한 사건이다. 인권위 조사관들이 고문 현장인 특별조사실을 찾았을 때 검찰이 이미 조사실을 깨끗이 치워놓았지만 조사관들은 침대 매트리스 아래에서 야구방망이를 찾아내 고문치사 의혹을 규명했다. 김형완 소장은 "이 사건을 통해서 검찰의 밤샘 수사 관행 등 검경의 강압수사에 경종을 울렸고 2007년 형사소송법 개정 때도 인권 보호 장치가 반영됐다"고 말했다.

학력 신체조건 등 입사지원서 차별 항목 실태 조사(2003년)가 이끌어 낸 사회변화도 주목할 만하다. 인권위 권고 이후 2003년 38개 기업이 차별 항목을 폐지한 것을 시작으로 공무원 시험 응시에서도 신장, 나이 제한이 없어졌다. 정연순 변호사는 "진정에서 시작돼 2006년 차별금지법 제정 권고로 이어졌고 채용 과정에서 연령 외모 등의 조건 때문에 차별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사회적 인식이 형성되는 계기가 됐다"고 평가했다.

지난 10년간 전체 인권침해 진정 중 가장 많은 부분(38.4%)을 차지할 정도로 대표적인 인권사각지대인 구금시설 감시(2006년 구치소 여성 수용자 성폭력 실태조사 발표 등)와 비정규직 문제(2007년 특수형태 근로 종사자 보호 방안에 대한 의견 표명 등)도 인권위의 중요한 성과로 꼽혔다. 또 지난해에는 스포츠 분야에 만연해 있던 선수 대상 욕설 폭력 성폭력을 직권 조사, 공론화시킨 것도 성과다.

최악의 결정 10선

하지만 인권위의 존재 이유를 의심케 하는 결정도 적지 않았다. 자문단은 만장일치로 MBC PD수첩 검찰 수사에 대한 인권위 의견 제출안 부결(2009년), 민간인 사찰(국무총리실, 기무사, 철도공사) 진정 각하(2010년),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 인권보호 관련 의견 표명 부결(2011년)을 최악의 결정으로 꼽았다.

홍성수 교수는 "PD수첩과 박원순 변호사 명예훼손 사건은 결국 법원에서도 무죄가 선고됐다"며 "법보다 앞서 나가야 할 인권위가 입장 표명을 회피하면서 법원보다도 못한 인권 수준을 드러냈던 사례"라고 꼬집었다. 이밖에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국민의 삶과 인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정책적 연구 부재, 올해 초 1인 시위를 한 인권위 직원 11명에 대한 징계 등이 선정됐다. 명숙 상임활동가는 "여성이 경찰서에서 입감될 때 속옷을 벗는 것을 사실상 인정한 결정(2008년)은 매우 안이했고, 야간시위 위헌법률 심판 제청 의견 표명을 부결(2010년)한 것은 인권위의 기능을 부정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남보라기자 rarara@hk.co.kr

이성택기자 highnoon@hk.co.kr

■ 거꾸로 가는 인권위 시계

"인권위가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됐습니다."

일반인들의 진정을 주로 접수하는 국가인권위원회 직원들은 최근 들어 진정인들로부터 이런 말을 자주 듣는다고 한다. 온갖 생떼를 쓰며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호소해도 모자랄 판에 진정인 스스로 인권위에 대한 기대를 접는다는 것이다. 출범 전부터 지속된 인권위의 독립성 사수 싸움은 국민의 신뢰를 쌓는 밑거름이었지만, 2009년 현병철 위원장 취임 후 독립성을 의심케 하는 일이 잦아지면서 위상도 곤두박질쳤기 때문이다.

인권위는 1997년 김대중 당시 대통령 후보가 대선 공약으로 제시하면서 설립이 공론화 됐다. 당초 정부는 법무부 산하에 인권위를 설치하려 했지만 인권단체들이 농성을 벌이며 맞서 2001년 11월 독립기구로 출범했다.

초기에도 인권위의 독립성을 둘러싼 논란은 있었다. 그러나 인권위는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도 이라크전 파병 반대(2003), 국가보안법 폐지(2005) 의견 표명 등 정부 정책에 반하는 목소리로 '정부기관'이 아닌 '독립기구'로서의 정체성을 다져갔다.

그러나 2008년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며 인권위는 최대 위기를 맞았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는 인권위를 대통령 직속기구로 축소시키려 한 것. 다행히 독립기구로 남았지만, 정부는 이듬해 인권위 조직을 20% 가량 강제 축소했다. 인권분야 전문성과 경험이 전무한 현병철 위원장이 취임하고 최고 의결기구인 전원위원회가 정부 여당이 추천한 보수인사로 채워지면서 인권위 위상이 약해졌다는 지적도 많다.

인권위는 특히 현 정부 들어 PD수첩, 민간인 사찰 등의 중요 사안에 대해 침묵했다. 새로운 인권 의제 발굴 노력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오히려 국내보다는 북한 인권 문제에만 집중하는 듯한 인상을 남겼다.

내부 반발도 이어졌다. 지난해 말 "추락하는 인권위의 바닥이 어디인지를 지켜보았다"며 중도 사퇴한 문경란 유남영 상임위원을 비롯해 인권위 설립 멤버, 전문위원 60여명 등이 줄줄이 인권위를 떠났다. 지난 7월엔 강인영 조사관에 대한 계약 연장 거부의 부당성을 주장하며 1인 시위를 한 인권위 직원 11명이 징계 처분을 받았다. 인권위의 갖은 파행에도 "떠난 자는 말이 없다"며 2년 동안 침묵했던 안경환 전 위원장이 "인권위가 다른 기관에 권고해 온, 헌법이 보장하는 행위에 대해 스스로 징계한다면 인권위가 왜 필요한가, 통탄할 일"이라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을 정도다.

인권위 위상 추락은 수치로도 확인되고 있다. 매년 증가하던 인권위 진정 건수는 올 상반기 20% 이상 줄었다. 인권위 설립 초기 80~90%에 달했던 정책권고 수용률도 현 정부가 들어선 2008년부터 46.9%, 31.6%, 33.3%로 현저히 떨어졌다. 한 인권 전문가는 "지난 10년간 인권위가 가장 크게 잘못한 것 중 하나는 인권위 독립성을 부정하는 현병철 위원장의 부임을 막지 못하고 사퇴시키지도 못한 것"이라고 말했다.

남보라기자 rarar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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