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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규장각 도서 반환 주역 '직지 대모' 박병선 박사 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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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규장각 도서 반환 주역 '직지 대모' 박병선 박사 타계

입력
2011.11.23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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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가 병인양요 때 약탈해간 외규장각 도서의 존재를 확인해 도서 반환에 결정적으로 공헌한 재불 서지학자 박병선 박사가 22일 오후 10시40분께(현지시간) 파리 시내 병원에서 별세했다. 고인은 직장암으로 지난해부터 여러 차례 수술을 받았으나 결국 회복하지 못했다. 향년 88세.

서울에서 태어나 수녀를 꿈꾸던 박 박사는 진명여고와 서울대 역사교육과를 졸업한 뒤 1955년 프랑스 유학길에 올랐다. 국내 민간 여성으로 프랑스 유학 비자를 받은 첫 사례였다. 소르본대학과 프랑스고등교육원에서 역사학, 종교학을 공부해 박사과정까지 밟은 고인은 1967년부터 프랑스국립도서관에서 사서로 일하면서 한국 자료 연구에 몰두했다.

그는 1972년 국립도서관이 소장한 '직지심체요절'이 그때까지 세계 최고로 알던 '구텐베르크 성서'(1455년)보다 78년 빠른 금속활자본이라는 사실을 처음 밝혀냈다. 많은 사람이 존재를 알았으면서도 '한국에서 설마'하고 무시하던 일을 치밀한 고증으로 확인한 것이다. 직지는 이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됐고 고인은 이 일로 '직지 대모(代母)'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어 5년 뒤에는 프랑스가 강화도에서 약탈해간 외규장각 도서(297권)가 국립도서관 베르사이유 별관 파손 창고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이 도서 목록을 정리해 언론에 공개했다. 이후 한국에서 반환 움직임이 일자 파장을 우려한 도서관에서 해고 당했지만 굴하지 않고 10여년 간 도서관을 찾아가 열람하며 내용을 모두 정리했다. 이렇다 할 외부 지원도 없이 일요일을 제외하고 일주일 내내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비단으로 만든 암록색 표지의 의궤를 뚫어지게 보는 그를 두고 주위에서 '파란 책 속에 묻혀 사는 여성'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5년 단위 대여'라는 단서가 붙긴 했지만 뺏긴지 145년 만인 올해 이 도서가 돌아온 것은 고인의 업적이나 마찬가지다.

이외에도 고인은 독립을 호소하기 위해 1919년 파리 강화회의에 온 김규식 일행이 머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표방한 건물을 찾아냈고, 1900년 전후 프랑스 문서를 발굴 정리해 을 냈다. 직장암이 발견돼 지난해 1월 경기 수원 성빈센트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10개월 만에 파리로 돌아간 뒤에도 병인양요 관련 프랑스 사료를 모아 2008년에 낸 속편 준비 작업을 계속해왔다.

고인에게는 외규장각 도서 반환에 기여한 공로로 지난 9월 국민훈장 모란장이 수여됐다. 병세가 악화해 파리 15구에 있는 잔 가르니에 병원에 입원한 직후인 지난달 25일 주불대사관 직원이 들고 간 훈장을 건네 받은 고인은 의식이 가물가물한 상태에서 눈물을 보였다고 유족들이 전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이날 조전을 보내 "대한국민은 우리 역사와 문화유산에 대한 박 박사의 깊은 애정과 숭고한 업적을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라며 "대한민국 정부와 국민을 대표해 유족께 깊은 애도와 위로를 전한다"고 밝혔다. 문화체육관광부는 고인과 유족의 뜻에 따라 국립묘지 안장 심의를 국가보훈처에 요청했다. 프랑스 현지의 장례가 끝나고 국립묘지 안장이 확정되면 유해를 한국으로 모셔올 계획이다.

미혼인 고인은 직계가족이 없으며 유족 대표는 미국에 거주하는 남동생 병용(81)씨가 맡는다. 빈소는 파리 한국문화원에, 국내 분향소는 서울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과 직지가 만들어진 청주 고인쇄박물관에 마련됐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파리=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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