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1월 23일 북한의 연평도 포격 직후 혼란에 빠진 건 연평도 주민만이 아니었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역시 국민의 불안을 달래주지 못하고 허둥대긴 마찬가지였다. 특히 연평도 대피소 시설뿐만 아니라 경기 북부, 강원 접경지역, 수도권의 대피소도 관리 부실로 사실상 제 기능을 못하는 곳이 수두룩했다. 유사시 즉각 작동해야 할 정부의 위기 대응 매뉴얼도 무용지물이었다. 지난 1년간 정부는 당시 경험을 교훈으로 삼겠다며 갖가지 보완책을 내놨다. 소방방재청에 따르면 22일 현재 전국의 대피소는 2만4,534개(8,420만 5,648㎡)로, 대피소 공간은 인구 대비 221%를 확보했다. 위기 대응 매뉴얼도 정비했다. 과연 우리의 위기 대처 수준은 달라진 것일까.
지난 18일 휴전선에서 불과 10㎞도 떨어지지 않은 경기 파주시 문산읍 문산리를 찾았다. 이곳은 군부대는 물론 배수펌프장, 군인아파트, 민가 등이 밀집해 있어 북한의 추가 포격 도발시 피해가 우려되는 지역. 1년 전 확인 결과 문제투성이였던 이 지역 대피소들이 그동안 얼마나 정비됐는지 직접 둘러봤다.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우선 대피소로 지정된 건물이 어디인지 알지 못하는 주민들이 대부분이었다. 300여세대가 사는 호수아파트 지하주차장은 대피소로 지정됐지만 상가 주민 이모(68)씨는 "20년 전 건물이 들어서기 전부터 이곳에서 장사를 했는데 대피소가 있다는 소리는 금시초문"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대피소인 파주드림센터 지하1층 창고 관리인 이모(47)씨도 "표지판이 문 앞에 하나 있는데 유사시에 여기를 찾아올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대피소 내부 상황도 열악했다. 문산보건소 지하에 마련된 공간은 먼지가 두텁게 쌓인데다 환기시설조차 없어 들어간 지 5분도 안 됐는데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합판을 덧댄 천장에는 구멍이 뚫렸는가 하면 바닥 곳곳은 장판이 벗겨져 흉물스러웠다.
관리를 담당하는 지자체도 대비가 소홀하긴 마찬가지. 지하주차장이 대피소로 지정된 율곡아파트 관리인 강모(41)씨는 "지난 2월 파주시 담당자가 전화해서는 '대피소 있냐'고 묻고는 끊었다"며 "연평도 사건 이후 특별점검은 전혀 없었다"고 말했다.
심지어 대피소가 사라졌는데도 국가재난정보센터 홈페이지에는 여전히 대피소로 안내돼 있는 경우도 있었다. 파주시에서는 문산농협을 대피소라고 안내했으나 농협 관계자는 "지난 1999년 수해로 건물이 잠긴 후 안전상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부실한 현장 상황 이상으로 정부의 총체적인 위기 대응 시스템 또한 여전히 불안하다. 정부는 지난해 12월 북한의 연평도 포격 후 대책을 발표하면서 '국가 위기 사태 대응 매뉴얼'을 꼼꼼하게 재정비하겠다고 밝혔다. 위기 대응 매뉴얼은 국가의 위기 상황을 유형별로 나눠 각 부처와 기관들이 즉각 수행해야 할 절차를 단계별로 명시한 시스템이다. 참여정부 때인 지난 2005년 마련된 후 현 정부 들어서도 매년 조금씩 보완됐다. 국가 안보와 직결된 사안이기 때문에 2급 국가기밀로 분류돼 일반에 공개된 적은 없다.
정부 관계자는 "연평도 도발 이후 30여 개에 달하는 위기 관련 표준 매뉴얼들을 올 상반기에 일일이 점검하고 손 봤다"며 "북한의 국지도발과 테러, 자연재해, 전력ㆍ원유 수급 대란 등 상황별 매뉴얼을 보완하고 관련 법령 정비를 마쳤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같은 호언장담이 무색하게 지난 9월 대규모 정전사태가 발생하자 정부는 전국적으로 벌어진 혼란에 어쩔 줄 몰라하더니 결국 예비전력 수치를 허위로 발표한 사실까지 들통났다. 지난 8월 북한의 북방한계선(NLL) 포격 때도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이며 늑장대응을 했다. 이에 정부는 10월 초 또 다시 "각 부처의 비상사태 대응 시스템을 전면 보완하겠다"고 발표했다. '북한의 도발 또는 재난발생→사후약방문식 대응 매뉴얼 보완'이라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김태환 재난정보학회 총무이사는 "연평도 포격 이후 1년이 지났지만 정부와 지자체의 수박 겉핥기식 보완조치로 국민들의 안전은 나아진 게 없다"며 "아무리 좋은 매뉴얼이 있어도 공무원과 정부의 임기응변식 대응 마인드가 바뀌지 않으면 소용 없다"고 지적했다.
최문선기자 moonsun@hk.co.kr
김현수기자 ddackue@hk.co.kr
이성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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