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6일 오후 8시 서울 구로구 가산문화센터 지하 1층 연습실. 10명 남짓한 사람들이 악기를 메고 연습에 한창이다. 얼핏 보기엔 여느 밴드와 다를 바 없지만 자세히 보니 머리가 하얀 50대부터 노랗게 염색한 20대까지 연령층이 다양하다. 연습곡 하나를 합주하자 키보드를 치던 젊은 여성이 "참지렁이님 다음주 공연인데 이렇게 못하시면 어떡해요"라고 말했다. 베이스를 맨 50대 남성은 "지난 주에 해외출장을 다녀오느라 연습을 못했네요"라고 너털웃음을 지었다.
이들은 서울 구로구 디지털산업단지 내 첫 연합밴드 'F1'. CEO부터 말단 사원, '왕년에 놀아본 오빠'부터 처음 악기를 만져보는 '생초보'까지 16명이 뭉쳤다. 나이와 소속은 제각각 이지만 목표는 하나. '디지털산업단지 내 중소ㆍ벤처기업들을 춤추게 하라'
이들이 처음 만난 건 지난 8월이다. 산업단지공단 홈페이지에 '밴드 결성을 도와드립니다'는 공지가 떴다. 산업단지 근로자면 누구나 환영이라고 했다.
JHW그룹 이창주(50) 사장은 고등학교 축제 때 밴드를 결성해 송골매 노래를 불렀던 기억을 떠올렸다. 35년 전이다. 이 사장은 "96년 창업을 한 이후 앞만 보고 달려왔다"며 "일탈을 해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고현옥(30)씨는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해 따로 보컬 팀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악기 별로 전문 음악인을 붙여주고 연습할 공간을 마련해준다는 얘기에 솔깃했다"고 말했다.
이렇게 해서 CEO 4명을 포함, 모두 16명이 모였다. 처음 보는 얼굴들이었지만 알고 보니 같은 건물(대륭 포스트타워 6차)에서 일하는 사람이 4명이나 됐다. 디지털단지에는 입주업체가 1만개, 근로자는 12만 명이 넘지만 거래처가 아니면 다른 회사 사람들과 교류할 기회는 전무한 실정. 키보드를 치는 최지안(29) 씨는 "큰 회사에 다니는 친구들이 사내에 음악 동아리가 있다고 말할 때 가장 부러웠다"고 말했다.
이들은 내친 김에 디지털단지 내에 문화 공연을 확산시켜보자는 목표에도 의견이 일치했다. 컴퓨터 키보드에서 '도움말'을 뜻하는 F1을 밴드 명으로 정한 것도 이런 이유. 취미활동에만 그치지 말고 단지 내에서 도움이 필요한 곳은 어디든 찾아가자는 것이다.
나름 원칙도 정했다. 총무를 맡고 있는 송희정(32) 씨는 "CEO분들이 많아 젊은 친구들이 좀 어색하고 불편해 하기도 했다"며 "그래서 직책대신 닉네임을 부르기로 했다"고 말했다.
결성한 지 석 달 밖에 안됐지만 F1은 제법 유명세를 타고 있다. 얼마 전 산업단지공단이 만든 공익광고에서'청렴송'을 불렀고, 이달 초에는 정립전자가 진행한 나눔콘서트에 게스트로 출연했다. 오는 24일에는 서울 여의도 중소기업중앙회에서 열리는 '제 1회 QWL 산업단지 가족 문화예술 한마당'에 서울 대표로 출전한다. 이 행사는 일하고 싶은 산업단지를 만들자는 취지로 산업단지공단이 추진하고 있는 QWL(Quality of Working life)사업의 일환으로 광주와 창원 구미 등 전국 산업단지에서 7개 팀이 출전한다.
F1은 '미인'과'세월이 가면' 두 곡을 연주할 예정이다. 보컬을 맡고 있는 김대훈(46) 씨는 "이번 공연을 마치면 내년 1월에는 반포대교 특설무대에서 공연을 준비하고 있고 산업단지 내에서 점심시간 도시락 콘서트, 지하철 구로디지털단지역 출구에서 게릴라콘서트 같은 것도 시도해보고 싶다"면서 "어려운 경제상황에서도 묵묵히 일하는 중소기업인, 벤처기업인들에게 작으나마 힘이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유환구기자 redsu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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