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노총 부산본부 김진숙(51)지도위원이 10일 지상으로 내려왔다. 한진중공업 해고노동자의 복직을 위해 그가 지상 35미터 위 크레인의 흔들리고 비좁은 철판 공간에서 사계절을 지낼 때 부산에는 96년만의 추위가 찾아왔고 유난히 비도 많이 내렸다. 빗물이 이불을 적시면 쪼그려 앉아서 자는 날도 숱했고 그를 지탱해주는 동료들과 희망버스의 시민들이 용역깡패에게 맞는 모습을 보면서 밥이 넘어가지 않았던 나날도 많았다. 이 공간은 2003년에 그의 20년지기였던 김주익 당시 한진중 노조지회장이 똑같은 문제로 올랐다가 129일만에 목을 맨 주검으로 내려온 곳. 그때 받았던 상처를 노동자들에게 다시 겪게 하고 싶지는 않아서 반드시 살아서 내려가겠다는 약속을 그는 309일 만에야 지킬 수 있었다. 부산 사하구 오케이오 병원에서 가료 중인 그를 만났다.
-희망버스를 만든 송경동 시인과 정진우 진보신당 비정규직 실장이 18일 구속되어서 마음이 편치 않으시겠어요.
"우리 때문에 생긴 일이라 이틀 동안 잠도 못 잤어요. 정리해고라는 약자들의 아픔에 처절하게 공감한 시인에게 우리 사회가 상을 주지는 못 할망정 어떻게 처벌을 한다는 생각을 하는지 정말 안타깝고 답답합니다."
-몸은 어떠신가요?
"아직도 지상에 내려왔다는 게 실감이 안나요. 걸으면 땅이 울렁울렁거려요. 나이 드니까 옛날에 다치고 맞은 게 다 몸으로 오네요. 1986년에 노조활동 때문에 한진중공업(대한조선공사)에서 해직된 후 두 번 구속되었어요. 그때는 노동운동하면 대공분실로 끌려가서 엄청 맞았습니다. 감옥에서는 징벌방에 갇히기도 하고. 철판에 깔린 사고로 오른쪽 발목은 감각이 없고 목과 허리에 디스크 증세도 있다고 하고."
-309일을 어떻게 견뎠습니까?
"특별히 이걸 참아야 한다, 이런 생각은 없었어요. 그냥 여기도 삶이 유지되는 공간인데 남들보다 특별하다 내려오니까 사람들이 대공분실하고 크레인이 어디가 더 힘드냐고 해요. 크레인은 거리가 있지만 사람들이 찾아오기도 하고 통화도 하고 때리지는 않거든요. 아마 대공분실이나 감옥의 경험이 없었다면 견디기 힘들었겠지요."
-크레인 위에서 가장 힘든 것은 뭐였지요?
"평상심을 유지하는 일이 제일 힘들었어요. 갑자기 옆 크레인으로 특공대가 와서 치수 재고 그러면 강제침탈할까 두렵기도 했고. 교섭이 몇 달 만에 잡혔는데 회사에서 배째라로 나왔다 이러면 마음이 힘들어져요. 내가 뭔가 더 할 수 있는 일이 있는데 안하고 있는 것인가, 극단적인 생각도 들고."
-좌절해서 자살충동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의지적인 자살을 생각한다는 건가요?
"그렇지요. 저는 목숨을 걸고 올라왔는데 이게 교섭에 도움이 안 된다면 무얼 할 수 있을까. 처음에는 단식도 생각해 봤다가 어차피 30~40일이면 끌려 내려가야 할테고. 그렇게 해야만 사람들이 움직일 것인가, 그런 생각이 계속 들지요."
-평상심을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요?
"처음에는 조합원들이 밑에 있었어요. '야, 파이팅'하고 서로 소리도 지르며 힘을 냈어요. 나중에 집행부가 제가 있어서 오히려 교섭이 힘들다 그러면서 조합원들이 크레인에 접근을 못하게 했어요. 내가 사리사욕을 채우려고 올라온 게 아닌데 당시 집행부가 계속 왜곡해서 알릴 때 고립감. 그때 트위터가 힘이 됐어요. 2월 27일에 (매일 음식을 올려주던) 황이라씨가 스마트폰을 올려 줬는데 그 전까지는 간간이 이라씨와 통화를 해도 다 도청이 되니까 별 말을 못했거든요. 그런데 트위터를 하면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를 알고 관심을 가져 주는 것을 보고 힘이 많이 됐어요. 그래도 안개가 끼는 날은 여전히 무서웠어요."
-안개가 왜요?
"날이 맑으면 멀리까지 보이니까 사람들을 보면서 힘을 얻거든요. 그런데 안개가 끼면 앞도 안보이고, 밑도 안보이고 바람이 많이 불면 크레인이 흔들리거든요. 멀미하고 토하는 것은 곧 적응이 되었는데 허공에 혼자 떠있는, 아우 정말 안개는 무서웠어요."
-그래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사람들이 함께 한다는 느낌이었군요.
"네, 제가 밥을 못 먹고 내려 보내면 조합원들이 같이 밥을 안 먹는다고 해요. 아래에서 불안한 것이 여기서 다 보이고 느껴지거든요. 제가 올라온 걸 보고 조합원들이 그랬어요. 누나 내려와, 누나 죽으면 나 못 살아… 우리한테는 2003년에 김주익지회장의 죽음을 본 상처가 있거든요. 그래서 제가 그런 상처를 절대로 또 줘서는 안된다, 꼭 살아서 내려가겠다 생각했지요."
-회사 측에 대한 분노는 어떻게 다스렸나요?
"크레인에 129일을 있던 사람이 목을 매도 꼼짝을 않던 회사니까 아예 처음부터 큰 기대는 없었어요. 다만 국회청문회 때는 마음이 많이 흔들렸어요. 국회청문회가 어떤 데라는 걸 아니까 재벌이라는 사람이 거기 나가서 망신을 자초할 리는 없을 거다, 노사합의가 이뤄지겠다 생각했는데 청문회를 나가더라구요. 거기서 정동영 의원이 김주익 박창수 곽재규 사진을 보여주면서 이 사람들을 아느냐고 물었을 때 조남호 회장이 모른다 그러는데 정말 충격을 받았어요. 그 정도까지일 줄은 몰랐거든요. 내가 죽어도 나는 모르는 사람으로 그렇게 아무런 해결이 안되고 끝날 수도 있겠구나 생각이 드니까."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인 박창수씨는 91년 구속상태에서 의문의 '자살'을 한 것으로 발표됐고 이어 백골단이 영안실에서 시신까지 탈취해갔는데 그 후 진상규명은 되었나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밝히려고 했지만 당시 목격자인 간호사는 행방불명됐고 경비할아버지는 양심선언을 불과 며칠을 앞두고 돌아가셨어요. 당시 사건을 주도한 안전기획부는 비밀이라며 자료를 내놓지 못하겠다고 해서 아무 것도 밝혀진 것이 없습니다."
-원래는 경기도 강화사람이었지요. 그런데 왜 부산까지 갔어요?
"아버지하고 잘 안맞았어요. 제가 4녀1남 가운데 넷째인데 아버지가 중학교도 안 보내주려고 했어요. 중학교 때부터 신문배달도 하고 사료가게에도 다니면서 고등학교 2학년까지 다녔는데 더 이상은 견디기 힘들었어요. 집에서 무조건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간다고 부산으로 갔어요. 거기서 한복집에 들어가 금박 붙이는 일을 1주일간 하다가 너무 힘들어서 도망쳤어요. 그 다음에는 대우실업이라고, 남자들 와이셔츠 만드는 공장에 다녔는데 거기서도 매일 두드려 맞고 굶고 동료가 기숙사에서 투신자살하는 것도 보고… 거길 나와서 버스안내양을 하니까 임금은 세 배로 올랐는데 거기는 또 삥땅을 막는다고 알몸 수색을 하고."
-정말 한국 현대사를 온몸으로 겪었네요.
"그래서 대한조선공사에 들어가서 처녀용접공이 되었는데, 그때는 정말 행복했어요. 제가 일도 잘했어요. 용접공 수련 마칠 때는 최고수련생으로 상장 받고 회사에서도 모범사원 표창장도 받고."
-잘하면 회사를 상징하는 여직원으로 호의호식하며 사는 길을 걸을 수도 있었겠네요.
"제가 1986년에 노조대의원이 되어서 회사의 문제점을 지적하니까 간부들이 그랬어요. 내가 너를 과장까지는 시켜줄라고 그랬다, 일도 잘하고 회사에서 예뻐하는데 왜 그랬냐. 3,000만원을 줄 테니 노조 탈퇴하고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살아라, 옆에 돈을 쌓아 두고 그렇게 말하더군요."
-당시로는 엄청난 돈인데 어떻게 그 유혹을 이겼어요?
"당시 어용노조가 노동자들 복지후생비 떼어먹고 회사는 그걸 부추기면서 저임금으로 노동자들 쥐어짜고. 노동자들은 한푼이라고 더 벌겠다고 위험한 상황에서 과로를 하다 보니 공사현장에서 떨어져 죽기도 하는데 그게 모두 노동자 개인의 책임이라고 각서 쓰라는 그런 상황을 그대로 버려둘 수는 없잖아요. 저 혼자 잘살겠다고 동지들을 배신할 수가 없지요."
-그런 생각을 하면서 평생 고된 삶을 산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인데요.
"저도 처음에 부산으로 올 때는 한 5년만 열심히 일하면 집도 사고 차도 사고 그렇게 살겠구나. 그런데 절대로 이 사회가 노동자가 그렇게 사는 것을 허락해주지 않는 거에요. 그런데도 제가 이 삶은 내 진짜 삶이 아니다, 나는 나중에 아주 크게 되려고 입지전적인 삶을 살려고 그 고생을 지금 하고 있는 거다, 신데렐라 같은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제가 공부를 더하고 싶어서 야학을 다니게 됐는데 거기서 친구가 을 줬어요. 그 책을 읽고서야 제가 아, 이 삶이 진짜 내 삶이구나, 다른 삶을 겪기 위한 입지적인 삶이 아니라 이 삶이 내 삶이라는 것을 깨달으니까 그걸 고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309일이 한국사회에 기여한 것은 무엇일까요?
"경제위기 이후에는 노동자들이 계속 패배하는 싸움만 했어요. 고통분담이데올로기가 사회 전체적으로 퍼져 있어서 정리해고는 어쩔 수 없다는 의식이 노동자들 사이에서도 팽배해 있거든요. 기업가는 고통을 분담하지 않고 노동자만 고통을 지는 고통전담이데올로기인데 이걸 넘어서지 못했어요. 그런데 이번에 희망버스가 와서 노동자들에게만 일방적으로 희생을 강요하는 것에 제동을 건 거예요."
-희망버스의 의미가 엄청 크군요.
"그렇지요. 2003년에 사람이 죽어 나간 공간에 다시 오른 김진숙이라는 사람을 살린다 이런 뜻만 있는 게 아니라 노동자들만 희생을 강요하는 이런 분위기를 노동자가 아닌 계층의 다양한 사람들이 용납하지 않겠다는 거니까요. 그 분들이 나중에는 조선소 가까이도 못 왔어요. 그러면 산복도로에 모여서는 한목소리로 저를 부르는 거예요. 그리고는 손 흔들고 가는데, 저를 전혀 알지도 못하는 분들이 서울에서 광주에서 자기 돈 내서 와서 힘을 주시는 걸 보면서 꼭 살아서 내려가야겠다 했고, 제가 내려가기 위해서는 해고노동자의 복직이 이뤄져야 하니까 그걸 꼭 이루게 된 것이고요."
-앞으로 계획은?
"민주노총 부산본부로 돌아가서 노조원들 교육하고 훈련하는 일을 계속해야지요. 앞으로 노동운동은 비정규직과 하청노동자를 어떻게 감싸안을 것인가가 과제입니다. 경영자들이 잔인하게도 노동자와 노동자의 싸움을 만들거든요. 정규직은 정리해고가 불가피한데 그때 하청(비정규직)이 있어야 방패막이로 우선 잘려준다 하는 의식이 있고 하청은 파업을 하면 일거리가 완전히 없어지니까 '쟤들은 임금도 많으면서 배부른 짓 한다'고 파업종식 촉구대회를 열어서 회사 측의 방패막이가 되어주고. 정규직들이 비정규직과 비슷한 작업복을 준다고 항의도 하고 비정규직은 정규직보다 식당에서 늦게 밥먹어라 그런 차별의식도 있지요. 현대자동차나 한진중공업도 비정규직의 노조가입이 노조대의원회에서 계속 부결돼왔어요. 진짜 약한 자를 돕자는 것이 노동운동이잖아요. 309일을 겪으면서 노조원들도 하청과 함께 가야한다, 그런 의식도 생겨나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만일 노조운동이 아니라 진짜 하고 싶은 것을 하라면 무얼 하고 싶어요?
"다시 노동자로 돌아가 용접공으로 살고 싶어요. 아저씨들한테 일 배우고 담배시간이면 발 말린다고 햇볕에 다리 쭉펴고 이야기들 나누고 족구 함께 하던 그 행복한 시절이 늘 떠오르지요."
-이제 내려온지도 오래 되었으니 보고 싶은 사람은 다 만났지요?
"아니요. 제가 제일 보고 싶은 사람은 캄보디아에 사는 콩단이라고, 제가 몇 년전부터 후원하는 9살짜리 아이가 있는데, 걔를 보러 가야 해요. 아빠는 돌아가시고, 엄마는 태국에 돈 벌러 간다고 행방불명인 아이인데 작년에 보러 갔더니 한여름에도 겨울 옷을 입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저와 비슷한 동네 아기를 안고 있더라구요. 내년 여름에 꼭 오마고 했는데 올해 못 갔잖아요. 크레인으로 올라갈 때도 캄보디아 회화책은 들고 갔어요.(웃음) 몸을 추스리면 걔를 보러 가야지요."
서화숙선임기자 hssu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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