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대형 증권사 A에 30억원의 거액 뭉칫돈이 들어왔다. 초고액자산가(VVIP)가 서울 반포동 서래마을에 있는 빌라를 처분하고 수중에 들어온 돈을 고스란히 증권사에 맡긴 것. 이 상황만 보면 증권사는 쾌재를 불러야 하건만, 막상 증권사 담당 직원은 "냉가슴을 앓았다"고 털어놨다. 건물 매매가 여의치 않자, 몇달 전 이 VVIP가 증권사에 "내 건물을 팔아달라. 성사시키면 그 돈을 예치하겠다"고 제안을 했다고 한다. 증권사 측은 "VVIP의 제안은 사실상 명령이나 다름없다"며 "증권사는 현행법상 부동산 매매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제휴사인 부동산 업체에 특별 부탁을 하는 등 마음고생이 심했다"고 털어놓았다.
부동산 경기 침체가 장기화하면서 거액 예탁을 대가로 증권사에게 팔리지 않는 땅이나 건물을 처분해 달라고 요구하는 자산가가 늘고 있다.
20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주요 대형 증권사들의 경우 부동산 처분을 의뢰받는 건수가 일주일에 3, 4건에 이른다고 한다. A증권사만 해도, 상반기 이런 방법으로 부동산이 처분돼 흘러 들어온 자금이 100억원 규모다. 슈퍼리치를 겨냥한 자산관리 서비스 시장이 금융업계 최대 격전지로 떠오르면서 증권사들이 앞다퉈 "무엇이든 해결해주겠다"며 경쟁적인 부유층 고객유치에 나서자 VVIP들도 점점 더 까다로운 요구를 하고 있다.
그간 증권사들이 VVIP들을 대상으로 한 재산 관련 특별 서비스는 부동산 매매에 관한 자문과 세무 등 두 가지가 대부분이었다. 증권사들은 강남은 물론 강북 주요 거점 지역에 부자를 겨냥한 VVIP점포를 열고, 고객들한테 본업인 주식투자를 권하는 일 외에 부동산 투자 시 유의점과 절세 요령 등의 서비스를 제공해 왔다.
이런 특별 서비스의 '맛'을 본 VVIP들은 이제 한발 더 나아가 증권사들한테 부동산을 직접 팔아달라고 요청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자본시장법상 증권사가 부동산 관련 자문은 부수 업무로 가능하지만, 직접 매매 중개는 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증권사는 제휴사인 부동산 업체에 연결해주는 방법을 취하되, VVIP에게 거래 상황을 보고하는 등 개인 비서 역할을 한다. 혹여 금융당국의 감사에 걸릴 것에 대비해 부동산 제휴업체로부터 소개비조차 받지 않는다고 한다.
이처럼 법을 어기지 않고 부동산을 팔아주는 것 자체도 어렵지만, 또 다른 '복병'도 있다. 고객들이 매물로 부탁하는 건물이나 땅이 대개 시장에서 인기가 없는 것들이란 점이다. 예컨대 강원도 산골 땅이나 서울에 있더라도 100억원 이상이라 수요가 별로 없는 건물 등이다. 애초에 공인중개사를 통해 쉽게 매매할 수 없는 '물건'들이 결국 증권사 VVIP점포로 몰려들고 있는 것이다.
한 증권사 프라이빗뱅커(PB) 컨설턴트는 "까다로운 거액 부동산 거래 성사 여부가 증권사 VVIP점포와 해당 PB의 능력 평가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데다, 부동산을 처분한 돈을 증권사에 전부 맡기겠다고 하니, 어려움이 많더라도 이 업무에 올인을 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강아름기자 sara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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