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는 시장에 내맡겨진 의료제도의 한계 때문에 갈등하는 환자들과 의사들의 이야기이다. 나는 의사로서, 이 영화에 우리나라 의료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줄 것이다.' 사뭇 비장한 서두의 자막부터 심상치 않다. 의사로서 국내 의료제도의 문제점을 파헤치겠다니 눈이 둥그레질 수밖에 없다.
다큐멘터리영화 '하얀 정글'은 82분의 상영시간 동안 서두의 다짐을 그대로 실천한다. 돈이 없어 병원 문턱을 넘지 못하는 사람들의 비참한 현실을 목도하고, 돈벌이에 혈안이 된 3차병원(대학병원ㆍ종합병원)들의 실태를 적시하며 잘못된 국내 의료체계를 고발하고 비판한다.
신문과 방송을 통해 으레 들어온 이야기이고, 누구나 한번쯤 겪어본 사례들이 등장하지만 영화가 종점을 향할수록 어쩔 수 없이 주먹이 쥐어진다. 병원들이 국소마취를 해도 되는 수술에 고가의 전신마취를 권한다는 이야기, 31초마다 '손님'(환자가 아니라) 한 명을 대하는 초스피드 진료, 환자유치 실적에 따라 대학병원 교수들에게 인센티브가 제공된다는 내용은 외면하고 싶은, 불편한 진실들이다.
특히 백혈병에 걸려 병원 신세를 져야 했던 박진석씨의 사연은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무색하게 만든다. 1억원의 수술비를 감당할 수 없어 골수이식을 포기하고 항암치료에 의존한 그는 완치의 기쁨을 맛보지만 이후 또다른 투쟁에 나서게 된다. 박씨가 부당 청구된 치료비를 발견하고 한국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진료비 확인 신청을 하자 그를 치료했던 한 대학병원은 회유와 협박에 나선다. '치료해줬더니 뒤통수 친다', '다음에 재발하면 치료 안 해준다' 등의 말을 듣고서야 박씨는 치료비의 절반이 훌쩍 넘는 1,900만원을 돌려받았다. 가족의 미래 생계를 위해 1억원짜리 수술을 포기했던 사람에게 가해진 무형의 폭력이 참 가혹하다.
영화는 현 의료체계의 문제가 공공(국민건강보험공단)이 재정을 대고, 민간이 진료를 하는 이중적 구조에서 비롯됐다고 주장한다. 국민의 의료비 부담을 줄이고, 의료 사각지대를 없애려면 공공 의료 서비스를 넓혀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막바지에 다다르면 과녁은 뚜렷해진다. 현 정부 들어 검토되고 있는 병원의 영리법인화가 실현되면 의료 복지는 종적을 감출 것이라고 강조한다.
감독은 영화 초반 천장 틈으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을 두 손 모아 받는 모습을 보여준다. 영화 막바지에 그 손은 천장을 뚫어 물이 콸콸 쏟아지도록 만든다. 살아가는데 필수적인 의료 서비스가 좀 더 보편적인 혜택이 되길 염원이 담겨있는 장면들이다.
영화는 신자유주의의 원조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의 발언을 인용하며 끝을 맺는다. '모든 것에 대해 시장경제 체제를 도입한다 해도 국방과 의료만큼은 정부의 책임이다.'
산업의학과 전문의인 송윤희 감독의 데뷔작이다. 그는 돈 몇 만원이 없어 치료를 포기한 환자들을 보고 연출을 결심했다고 한다. 제작비는 900만원이라는데 진실성과 그 울림은 몇 십억짜리 상업영화보다 크다. 12월 1일 개봉.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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