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학규 민주당 대표는 18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 처리 문제에 대해 "정부는 국회에 비준을 요구하기 전에 재협상에 나서야 한다"며 비준동의안 처리 반대 입장을 재확인했다. 그는 연일 '투자자ㆍ국가소송제도(ISD)를 폐기하지 않는 한 비준안 처리를 저지하겠다'는 강경 입장을 밝히고 있다. 일부에서는 한나라당 소속으로 경기지사를 지낼 때 FTA 전도사를 자처했던 손 대표가 변절했다고 비판하고 있다. 본래 대화와 타협을 중시했던 손 대표가 이토록 한미 FTA 저지를 위해 최전선에 나서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우선 '국익'이란 명분을 내세우고 있다. 이명박 정부가 재협상을 하는 과정에서 자동차 분야 등에서 이익균형이 깨졌기 때문에 FTA에 찬성할 수 없다는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 손 대표는 15일 국회를 찾은 이명박 대통령과 면담하는 자리에서도 "한미 FTA에서 양국 간 이익의 균형이 깨져선 안 되므로 최소한 ISD 조항은 폐지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는 표면적 이유일 뿐이란 지적이 많다. 손 대표가 처한 정치적 상황에서 강경론의 배경을 찾는 게 더 정확할 것이란 얘기가 나오고 있다.
우선 대선 승부수로 야권통합을 추진하고 있는 손 대표 입장에서는 FTA 비준안을 처리해 주기 어렵다. 통합 대상인 야권이 대부분 FTA를 강력히 반대하고 있기 때문에 비준안 처리에 합의하는 순간 야권 통합은 물론 그의 대선 꿈도 물거품이 될 수밖에 없다. 민주당 관계자는 "손 대표가 노선 문제로 사사건건 갈등하던 정동영 최고위원과 손을 잡은 것도 이런 정치적 이해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한나라당 출신인 손 대표가 민주당의 전통적 지지층을 의식해 FTA 문제에서 더욱 강경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손 대표가 올해 5월 한나라당의 한ㆍ유럽연합(EU) FTA 처리에 유보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을 때도 당내에서 '손 대표의 출신'이 회자된 적이 있다. 하지만 손 대표 측근은 "지나친 분석"이라며 "중산층과 서민층을 대변하는 정당의 대표로서 대기업과 재벌에게만 이득이 돌아갈 수 있는 FTA에 대해 반대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3김씨와 같은 '오너'형 당 대표가 과감한 결단과 협상으로 대치 정국을 풀었던 과거와 달리 집단지도체제 아래에서는 대표의 역할이 제한될 수밖에 없다는 해석도 나오고 있다. 박희태 국회의장이 이날 손 대표 등 민주당 지도부를 향해 "김대중 전 대통령 같은 통 큰 정치인이 돼 달라"고 당부한 것도 이 같은 맥락에서 나온 말이다.
여러 사정을 감안하면 손 대표가 FTA 비준안 처리 반대 입장에서 찬성으로 선회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FTA를 국민투표에 부치자" "먼저 미국과 재협상한 뒤 19대 국회에서 처리하자" 등의 주장을 하면서 강하게 밀어붙이는 손 대표의 승부수는 과연 효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김정곤기자 jk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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