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5일 새벽 서울 이태원의 주점 4곳을 태운 방화 추정 사건의 용의자인 주한미군 P(21) 일병은 경찰에서 두려운 기색이 없었다. 16일 서울 용산경찰서에 나온 P 일병은 "냄새를 없애려고 촛불을 켰는데 화장실에 다녀오니 불이 나 있었다. 도망친 게 아니다"며 끝까지 오리발을 내밀었다. 경찰이 발화지점인 주점 주변에서 달아나는 P일병의 모습이 포착된 주변의 폐쇄회로(CC)TV로 화면 등 명백한 증거를 내밀었지만 그는 방화가 아닌 실화(失火)를 주장하며 버틴 것이다. 경찰 관계자는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 때문에 한국 경찰이 수사를 제대로 못한다는 것을 알고 빤한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주한미군사령부가 미군 범죄를 막기 위해 교육 강화, 야간통행 금지 등의 조치를 내놓았지만 좀처럼 약발이 듣지 않고 있다.
18일 관계 당국에 따르면 주한미군 범죄 건수는 2008년 183건에서 지난해 377건을 기록하는 등 증가 추세다. 올해 들어서도 지난달 말까지 244건의 미군 범죄가 발생했다. 최근에도 서울 마포(9월 17일), 경기 동두천(9월 24일) 등에서 주한미군의 10대 여성 성폭행 사건이 발생했다. 미군 범죄는 왜 줄지 않는 것일까.
우선 무기력한 SOFA 규정이 미군 범죄자 양산에 일조하고 있다는 지적이 많다. 유영재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 미군문제팀장은 "SOFA에 따르면 현행범이 아닌 경우 미군 측에서 신병 인도 요청을 하면 한국 정부는 지체 없이 신병을 넘기도록 하고 있다"며 "검찰이 구속 기소해 신병을 넘겨 받을 때까지 미군 용의자는 얼마든지 증거를 조작하거나 진술을 바꿀 수 있어 처벌을 피해갈 수 있다"고 지적했다.
통금 제도 자체가 유명무실한 측면도 있다. 미군은 평일 0시부터 오전 5시, 주말과 공휴일은 오전 3~5시 통금 조치를 취했지만 P일병의 방화사건은 통행금지 시간인 화요일 오전 2시38분에 발생했다. 미군 헌병과 한국 경찰이 이태원 홍대 등에서 순찰을 돌지만 모든 지역을 확인할 수는 없다.
통금을 어겨도 솜방망이 처벌을 받기 때문에 실효성이 부족하다. 최근 카투사에서 전역한 유모(28)씨는 "통금이라고는 하지만 복귀가 늦더라도 아침 점호에만 참석하면 넘어가는 분위기가 만연해 있다"고 지적했다.
주한미군 사병의 자질 문제도 제기된다. 경기 동두천의 한 미군 부대에서 근무하는 군무원은 "문제를 일으키는 미군 사병은 모병제 자원자들이다 보니 아무래도 미국에서 직업을 구하기 힘든, 학력이나 수준이 떨어지는 사람이 많이 모여든다"며 "한국법과 한국민을 존중해야 한다는 인식이 다른 한국 주재 미국인들보다 약한 편"이라고 말했다.
이장희 한국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불평등한 SOFA 규정 때문에 미군들은 죄를 저질러도 처벌 받지 않는다는 안일한 생각을 갖고 있는 게 사실"이라며 "경찰의 구금권을 확립해 기소 전후 필요에 따라 미군 신병을 인도 받을 수 있도록 SOFA 규정을 개정하고 미군에게 사건 예방 책임이 있다는 점도 각인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여전한 미군 범죄와 불합리한 SOFA규정에 대한 한국 내 부정적 분위기를 아는지 모르는지 마크 리퍼트 미 국방부 아시아태평양 차관보 후보자는 17일 상원 군사위 인준 청문회에서 "SOFA규정을 개정하기 보다는 SOFA 합동위원회의 논의를 통해 운영방안을 개선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취지의 의견을 피력했다.
정민승기자 msj@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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