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의 뒷골목 풍경/양태자 지음/이랑 발행·256쪽·1만5,000원
한국인 비교종교학자가 시계를 거꾸로 돌려 중세 유럽의 뒷골목으로 걸어 들어갔다. 오물과 동물 시체가 널린 지저분하고 어수선한 거리에서 그가 만난 것은 비주류 인생들. 유랑 악사, 거지, 사형집행인, 매춘부, 유대인, 마녀…. 귀족들의 사치스런 삶과는 전혀 달랐던 그들의 세상을 전하는 책이다. 봉건제 아래 교회가 세상을 주무르던 시절인 만큼 귀족과 교황도 등장한다.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된 수많은 죄악과 부패, 정치의 이면에 숨은 이야기도 나온다.
한국인에게 중세 유럽은 매우 낯선 시공간이다. 저자는 독일에서 20년 넘게 공부하며 모은 자료를 바탕으로 독자를 안내한다. 동성애를 단속하던 '밤의 관청', 시가 운영하던 매춘굴 '여성의 집', 향락과 매춘, 치료의 장소로 붐볐던 공중목욕탕 등 흥미로운 풍경들과 마주친다. 무려 53명의 아이를 낳은 여인, 거리 행진 중 아이를 조산하고 죽은 '여자' 교황, 사랑에 미쳐 기행을 일삼다가 비참하게 죽은 여왕, 어린아이의 피를 사랑의 묘약으로 애용한 귀부인 등 별난 여인들도 주요 출연자다. 마녀 사냥과 전염병, 성물 숭배와 성지 순례, 공개 처형이 극성을 부리던 그 시절의 기이한 소란과 끔찍하고 어리석은 장면들도 빠지지 않는다.
각 이야기의 주인공은 대부분 잊혀진 이름들이지만, 몇몇은 역사가 기억하는 유명 인사들. 르네상스 시대의 탕녀 루크레치아 보르자, 종교 개혁가 마르틴 루터, 성 바르톨로메오의 날에 신교도 대학살을 일으킨 프랑스 왕비 카트린 드 메디치, 알렉상드르 뒤마의 소설 '삼총사'를 통해 낯이 익은 리슐리외 추기경 등이 포함돼 있다.
적은 분량에 많은 이야기를 담다 보니 깊숙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 아쉽다. 이것 저것 열심히 집어 먹어도 어쩐지 배가 허전한 뷔페 음식 같다고 할까. 가볍게 읽기에는 좋다.
오미환 선임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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