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가진 게 많다고 믿는 '대한민국 1%'는 지젝을 읽을 필요가 없다. 자신이 세상을 너무나 잘 안다고 생각하는 '도인'들도 읽을 필요가 없다. '이대로!'가 생활 신념이자 정치적 신념인 위인들도 지젝을 읽을 필요가 없다."
'로쟈'라는 필명으로 잘 알려진 이현우 한림대 연구교수는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자음과모음 발행)의 서문에 이렇게 썼다. 이 도발적인 '선언'은 거꾸로 누가, 왜, 어떻게 지젝을 읽어야 하는지를 읽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제목이 함축하듯 이 책은 슬로베니아 출신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의 사상을 쉽게 풀어 전하는 대중교양서다. 로쟈와>
이 교수는 17일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지젝은 현실의 해석보다 현실의 변화를 중요하게 여기는 학자"라고 강조하며, "국내에서 지젝에 관한 '진입장벽'이 더 낮아져야 한다"는 바람에서 책을 썼다고 말했다. "모두 '지젝거린다'고 할 만큼 국내 학계에서 지젝에 관한 논의가 많지만, 실제 지젝의 저서 판매량은 그렇게 많지 않아요. 강의를 하다 보면 학계와 대중의 괴리가 크다는 걸 실감하는데, 지젝이 대표적이죠. 사실 지젝은 재미있는 학자예요. 영화 '지젝!'의 아르헨티나 강연 실황을 보면, 나꼼수 콘서트를 연상시킬 만큼 청중 반응이 대단해요."
지젝은 철학적 주제를 SF소설, 할리우드 영화, 오페라 등 다양한 장르의 문화예술을 통해 변주해 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나꼼수만큼 만만하지 않다. 지젝은 라캉과 헤겔에 관한 독특한 해석으로 이름을 알렸다. 그는 헤겔의 변증법을 '정반합'의 완성된 사유가 아니라 '끝없이 분열하는 사유'로 읽어낸다. 영화 '에일리언'에서 에일리언을 몸에 품은 사람이 사람도 에일리언도 아니지만 동시에 사람이면서 에일리언인 것처럼, 지젝이 읽은 헤겔의 변증법은 정(正)도 반(反)도 아니면서 동시에 정과 반인 이상한 괴물을 만들어 내는 사유다. 라캉도 비슷하다. 주체란 언제나 분열된 채로 자기정체성을 구성해나가는 존재라는 것이 지젝이 라캉을 읽는 방식이다.
이 교수는 이런 지젝의 독창적 해석을 "학문적 업적"이라고 평가하면서 "지젝 읽기는 자기 자신의 타성과 기득권과 편의주의와 무사안일주의에 대한 저항"이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이번에 지젝의 저서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원제 'Welcome to the desert of the real', 자음과모음 발행)도 김희진씨와 함께 번역, 출간했다.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은 이 책을 한 줄 한 줄 읽어가며 지젝의 지적 여정을 소개하는 식으로 쓰여졌다. 로쟈와> 실재의>
지젝은 얼마 전 월가 점령 시위를 지지하는 연설을 한 것처럼 현실정치에도 기민하게 대응하며 자신의 논지를 설파한다. 특히 2000년대 이후 작금의 자본주의가 파국을 맞게 될 것이라며 '다시 레닌'으로 돌아가 새로운 코뮤니즘을 만들자고 말해왔다. 그가 강성 좌파로 분류되는 이유다.
<실재의 사막…> 은 지젝이 정치에 관한 책을 본격적으로 쓰게 된 계기가 된 9ㆍ11테러 관련 5편의 논문을 엮은 책이다. 9ㆍ11테러는 자본주의의 한계를 드러내는 사건이었지만, 미국은 자신이 속해 있는 세계가 어떤 세계인지 깨닫지 못했다는 것이 지젝의 평가다. 지젝은 9ㆍ11테러가 상징하는 승자독식의 자본주의체제의 균열을 예의 복잡다단한 사유로 설명하며 사람들에게 자본주의 매트릭스의 삶에서 빠져나올 용기를 가지라고 말한다. 실재의>
이 교수는 "지젝의 사유를 통해 한국사회에 생산적인 담론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서 '이대로는 곤란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지젝 읽기라는 저항을 함께 할 것을 권했다.
이윤주기자 mis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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