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빼고 인류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책이라면 단연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 일 것이다. 변증법적 유물론을 기반으로 자본주의의 구조와 변동법칙을 명쾌하게 밝힌 이 책은 이후 레닌에 의해 구체적 실천력을 얻으면서 단숨에 세계의 틀을 바꿔놓았다. 계급, 혁명, 해방 등 우리가 익숙하게 쓰는 개념들도 마르크스의 저작을 통해 비로소 의미를 얻었다. 현실체제뿐 아니라 이후 서양 현대사상사는 사실상 마르크스주의의 계승, 아니면 변용의 역사였다. 마치 철학자 화이트헤드가 "서양철학은 플라톤의 주석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 것처럼. 자본론>
■ <자본론> 은 출간 후 150년 동안 전 세계에서 끊임없이 재출간되고 언제나 입에 오르는 베스트셀러지만 사실은 '가장 읽히지 않은 책'이다. 분량부터 워낙 방대하다. 영역본 기준으로 1ㆍ2ㆍ3권 합해 2,000페이지 안팎에 달하고, 1권만 우리말로 완역해도 통상 두께로는 3권으로 나눠내야 할 정도다. 뿐만 아니다. '상대적 가치형태와 등가형태는 서로 속해 있고 제약하는 불가분의 두 계기지만 동시에 동일한 가치표현의 상호배타적이고 대립적인 극단이다'라는 식의 난해한 문장과 도식으로 꽉 차 있어 웬만한 내공으론 책장 넘기기도 힘들다. 자본론>
■ 한미FTA 비준문제로 또 사회 전체가 양분돼 극한적인 갈등양상으로 치닫고 있다. 협정안이 처음 합의된 참여정부에서는 당초 중소상공업자, 농어민 등 취약부문에 대한 피해가 쟁점이 되더니 현 정부 들어서는 자동차 부문 등 재협상에서의 일부 수정이 문제가 됐다. 자동차업체 당사자들이 "그 정도는 별 문제될 게 없다"고 하니까 이번에는 ISD(투자자국가소송제도)가 집중적인 논쟁대상으로 부각됐다. 주장의 옳고 그름을 떠나 오래 전에 나온 같은 내용을 놓고 매번 새로 문제들을 발견한 듯 논제가 전이돼가는 현상은 이해하기 어렵다.
■ 외교부가 번역 공개한 협정안은 총 24장 750페이지에 달하는 엄청난 분량이다. 상품별 양허표까지 더하면 1,500페이지나 된다. 전 정부 인사들의 "그땐 잘 몰랐다"는 변명이 이해도 되지만 국가정책 담당자로서 할 말은 아니다. 그러고 보면 요즘 목청 높이는 이들에게도 의심이 간다. 실제로 대개 논거가 '읽어보니'가 아니라 '들어보니'다. 누군가의 해석으로 해석하고, 주석에 주석을 다는 격이다. 논제 전이도 그렇고, 온갖 추정이 사실로 확대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아는 체 하지만 읽어보지 않은 <자본론> 이 떠오른 까닭이다. 자본론>
이준희 논설위원 junle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