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안녕하세요. 산책 가시나 봐요.” “막내 수능시험은 잘 봤대요?” “그래. 이 녀석 키가 많이 컸네.”
(동네 카페에서 나눈 대화는 자주 끊겼다. 모두 알아봤고, 인사를 건넸고, 일일이 답례를 했다. 피곤하겠다 싶었다.)
아냐. 힘들면 못 하지. 이 나이 되니까 세상 모든 게 다 고마워져. 상상 못할 만큼 많은 사람을 만나더라도, 만나면 다 고마운 사람이야. 옷깃만 스치고 지나쳐도 귀한 인연이라는데 누구 하나 날 몰라보는 사람이 없잖아. 가족처럼 여겨주고 인사해주고. 내가 마을 회장으로서, 큰형님으로서 안방극장에서 살아온 지난 세월이 헛되지만은 않다는 얘기 아니겠어? 이게 얼마나 큰 복이야. 내 삶이 성공한 인생으로 분류될 수 있다면, 그건 인기나 돈이 아니라 그런 친근함 때문일 거야.
나는 큰 굴곡 없이 살았던 것 같아. 살면서 겪은 어려움이 다른 사람의 10분의 1도 안 될 거야. 노력한 것에 비해서 받은 게 늘 많았지. 누가 물으면 농반진반으로 그래. “사주팔자가 잘 돼 있어서 그렇다”고. 아마 젊을 때 이런 말을 했다면 얄미운 인간 취급을 받았을 거야. 하지만 진짜 그랬어, 내 인생은. 큰 병치레 한 번 없이 여태껏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스포트라이트까지 받고 있잖아. 뒤집어 말하면 사람들이 배우의 삶에 기대하는 ‘재미’는 없다고 할 수도 있겠지. 재미있는 얘기 많이 못해줘서 미안해.
물론 내게도 힘든 시간은 있었지. 그 시간이 내겐 두 개의 방 이미지로 각인돼 있어. 그래서 힘든 시간보다 힘든 공간이랄까… 아무튼.
하나는, 이젠 기억도 아득한 어린 시절의 방이지. 배곯지는 않았지만 어려웠어, 유년 시절은. 아버지는 중국에 계셨고 어머니 혼자서 날 키우셨으니까. 어머니가 인쇄소 같은 데서 청소도 하고 온갖 허드렛일을 하셨어. 날 맡길 데가 없으니까 방 안에 두고 문을 잠그고 가셨어. 나다니면 위험하니까. 먹을 밥을 차려 놓고 요강도 놔두고 만화책 같은 것도 넣어두셨지. 인천의 사글세 단칸방에 살던 때야. 혼자서 하루 종일 그 방 안에서 지냈어. 멀어져가는 어머니의 쓸쓸한 발자국 소리가 지금도 생각나. 아마 어머니가 아침마다 마음이 무척 아프셨을 게야.
그래도 친구들은 찾아왔어. 나가지 못하니까 창호지에 구멍을 내고 가위바위보도 하고 그랬지. 가끔 주인 아주머니의 안쓰러운 눈빛과 마주치기도 했어. 그러다 어두워지면 어머니가 올 때까지 다시 혼자야. 방공훈련이 있던 시절이라 등화관제를 할 때면 캄캄한 밤이 무서웠어. 그래서 머릿속으로 혼자만의 드라마를 그렸던 것 같아. 혼자 소꿉장난 하는 것처럼 이런 역할 저런 역할 해보고. 내용은 잊어버렸는데 분위기는 기억나. 다섯 살짜리가 표현하는 아빠, 엄마, 아들이 어쩌면 그렇게 애절했는지.
도망치고 싶지 않았냐고? 글쎄 뭐랄까… 그 안이 편안했던 것 같아. 분명 외롭고 갑갑하고 무서운 공간이었는데, 그 속에 있으면 안전하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던 걸까. 그게 타고난 내 성품인가봐. 일탈의 욕구가 컸다면, 그래서 어린 시절 그 방을 박차고 나왔다면, 지금쯤 내 인생이 크게 달라져 있을 수도 있겠지. 근데 말이야, 이게 참 묘한 일인데… 나중에 내가 박수 받고 그럴 때, 그때마다 번득 머릿속으로는 어머니가 걸어 잠그고 나가시던 그 문고리가 떠오른단 말야. 말 그대로 ‘플래시백’이지. 시상식 같은 데서 상 받을 때, 무척 행복한 시간 속에 내가 있다고 느낄 때, 인천의 그 작은 방 속에 내가 있다는 착각이 들었어. 그게 어떤 정신작용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어.
두 번째 방은 스물 일곱쯤 됐을 때의 내 방일 거야. 군에서 막 제대한 뒤였지. 군대 있을 때 계급에 맞지 않게 큰 역할을 했어. 군 사령부에서 신병들을 훈련시키는 일이었지. 대학에서 연극을 전공했다는 사실 때문에 그 일이 내게 떨어진 것 같아. 부대를 연극 무대처럼 꾸며 놓고 교육프로그램을 지휘했지. 하루 수백명씩 이래라 저래라 하는, 일종의 연출이었어. 제대할 때 무슨 거창한 표창장까지 주더군. 헌데 제대하고 나니까 아무도, 정말 아무도 나를 기억해주지 않는 거야.
극단 생활을 함께 하던 친구들은 방송국에 입사해서 연기를 계속하고 있는데 나를 받아주는 곳은 없었어. 군대 가기 전의 경력은 깡그리 잊혀지고, 복학할 돈은 없고, 그렇다고 마땅한 취직 자리도 없고…. 내 곁엔 어머니뿐이었어. 명동에서 술장사 하시던. 탈출구를 찾을 수 없는 터널이 내 앞에 끝도 없이 계속되는 느낌이랄까. 잠이 안 왔어. 집에 손님이 오면 지내던 방이 하나 있었는데, 거기 쌓아둔 이불에 머리를 쑤셔 박아야 겨우 눈을 감을 수 있을 정도의 불면증에 시달렸지.
죽음도 여러 번 생각했어. 집안 어른 배려로 부산의 염색공장에서 일한 적이 있는데, 바다에 빠져버릴까 심각하게 고민했던 적도 있지. 이런 마음 이해할 수 있을까. 삶은 번민으로 가득 차 있는데 풍堧?너무 아름다워서, 그게 아까워서 죽을 수 없는 심정. 갓 염색을 끝낸 울긋불긋한 천들이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펄럭이는데 그게 어찌나 아름답던지… 실존적 번민? 난 그런 것 잘 몰라. 나중에 생각해보니 지독한 사춘기가, 그것도 무척 늦게 찾아왔던 것 같아.
술하고 담배밖에 날 위로해주는 게 없는 것 같았어. 밥을 씹어도 ‘나는 왜 이렇게 무능할까’ 하는 자책감에 목구멍으로 넘어가지가 않더구만. 그렇게 시름시름 곯아가고 있는데 어디선가 희미하게 교회 종소리가 들렸어. 지금이나 그때나 기독교 신앙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그때는 그 종소리가 나를 위로해 주는 것처럼 들렸어. 홀린 것처럼 교회로 찾아갔는데, 내 몰골을 보더니 목사님이 이렇게 얘기했어. “세상 모든 떡을 다 먹으려 들지 말게. 자네 몫은 하나밖에 없네.” 그 말을 듣는데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쏟아지는 거야.
그 길로 자존심 때문에 만나지 않던 친구들을 찾아갔지. 연극을 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부탁하러. 겨우 연극판에 다시 들어가고 얼마 안 돼 ‘순교자’ 민소령 역할을 맡게 됐어. 국립극단이 날 스카우트해간 계기가 된 역할 말야. 고통의 시간이 없었다면, 그래서 번민에 찬 민소령의 내면을 표현할 준비가 없었다면, 그 역할이 내게 떨어지지 않았을 거야. 아마 그게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우여곡절일 거야.
그래. 내 인생의 첫 번째 번민의 공간인 골방도 내겐 무대, 가장 큰 고통을 극복할 수 있게 해준 공간도 바로 무대였어. TV도 내겐 무대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해온 것 같아. 귀소본능이랄까, 난 다시 무대로 돌아가고 싶어. 거긴 내가 난 곳이고 자란 곳이거든. 그런데 이번엔 ‘그리스인 조르바’ 같은 욕망에 충실한 자유분방한 역할이었으면 좋겠어. 어쩌면 내가 살아온 인생과 다른 톤일지 모르지. 어린 시절 골방을 탈출하고 싶은 잠재 욕구 아니냐고? 글쎄, 그런 것보다는 인간과 인생에 대해 넓고 깊은 차원에서 이야기를 해보고 싶은 거라고 이해해줘. 나 자신과 관객들에게.
버킷리스트(죽기 전에 꼭 해보고 싶은 것을 적은 목록)? 연극은 얘기했고, 또 뭐가 있을까… 연출? 에이, 그건 어림없는 일이고. (목소리가 깊고, 낮게 깔렸다) 음… 사랑하는 역할이지 뭐. 여자의 눈길을 바라보면서 애틋한 마음을 주고 받는 것. 한번도 못해봤잖아. 인류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하지만 영원히 고루해지지 않는 주제 아닐까? 이거 나이 칠십에 주책없다 그러겠구만. 하지만 진심이야. 모든 배우, 모든 다른 사람들처럼.
정리 유상호기자 shy@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