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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어플루엔자에 감염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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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어플루엔자에 감염되다

입력
2011.11.14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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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계 부동산 컨설팅 회사에 다니는 문모(33)씨는 최근 어느 모임에서 불쾌한 경험을 했다. 합리적 명품 소비자를 자처하는 그가 차는 시계는 300만원대 태그호이어. 그런데 한 동석자가 "요즘 태그호이어는 강남에서 고등학생들이나 차는 거 아니냐"고 말한 것. 문씨는 "예전에는 이삼백만원 하는 롤렉스가 결혼 예물로나 받을까 말까 한 명품이었다면 이젠 천만원대 IWC쯤은 돼야 명품이라고들 생각한다"며 "아무리 명품이 대중화됐다고 하지만 요즘 분위기는 일종의 사회병리인 것 같다"고 말했다.

유령이 대한민국을 떠돌고 있다. 정점을 모르고 치닫는 소비자본주의의 유령이다. 소득 불균형과 양극화의 심화로 곳곳에서 못 살겠다는 아우성이 터져 나오는 가운데, 한편에서는 강박적으로 사치재를 추구하도록 부추기는 어플루엔자(Affluenza) 바이러스가 사회 전반에 번지고 있다.

세계적 컨설팅업체 맥킨지가 지난해부터 연 1회 발간하는 한국의 명품 시장 보고서를 보자. 올 8월 지난 1년간 명품을 100만원 이상 구매한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 따르면, 이들은 가계소득의 5%를 명품 소비에 지출해 일본의 4%를 앞질렀다. 한국의 명품 시장 규모가 일본의 절반 수준임을 감안하면 놀랄 만한 수치다. 한국은 2006년 이래 매년 평균 12%씩 명품 매출이 증가하고 있으며, 백화점의 명품 매출은 올 1ㆍ4분기에만 전년 대비 30% 이상 늘었다. 보고서는 향후 3~5년간 한국 명품 시장이 성장세를 지속할 것으로 내다봤다.

한국인의 '럭셔리 프렌들리' 경향은 2010년 조사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명품 소비에 죄책감을 느낀다는 응답자의 비율이 유럽연합 15%, 중국 14%, 미국 11%, 일본 10%인데 반해 한국은 5%에 불과했다. 명품을 자랑하는 것은 천박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비율도 일본 45%, 중국 38%, 유럽연합과 미국이 각각 27%였던 것에 반해 한국은 22%에 그쳤다.

최근 몇 년 새 폭발적으로 늘어난 한국의 명품 소비는 부(富)의 크기가 그만큼 증가했음을 뜻하지 않는다. 국민소득은 수년째 2만달러 언저리에서 정체돼 있고, 매년 하락세를 보이는 가계저축률은 2010년 2.8%를 기록, 세계 최대 소비대국 미국(5.7%)의 절반 수준이었다. 부자가 아니면서 부자처럼 살고자 하는 사람들, 즉 어플루엔자에 감염된 이들이 지금의 '럭셔리 공화국, 코리아'를 초래한 셈이다.

LG경제연구소 김나경 선임연구원은 "한국사회의 명품 소비 열풍은 국민소득의 증가로 인한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보기 어렵다"며 "명품이 하나의 신분증이 되고 있고, 실질임금이 하락하더라도 명품 소비에는 돈을 아끼지 않는 가치소비가 한국만의 독특한 문화로 자리잡고 있다"고 분석했다.

◆어플루엔자(Affluenza)=사치병, 소비중독 바이러스. 풍요를 뜻하는 어플루언트(affluent)에 유행성 독감 인플루엔자(influenza)를 더해 만든 합성어. 풍요로워질수록 더 많은 것을 욕망하는 현대인의 탐욕이 만들어낸 질병이다. 2007년 같은 제목의 책을 낸 영국 임상심리학자 올리버 제임스의 연구에 따르면 미국이나 영국, 러시아, 중국처럼 소득분배가 불균형한 국가일수록 감염 정도가 심한 반면, 덴마크처럼 소득균형이나 양성평등이 잘 이뤄진 나라는 그 정도가 매우 낮다.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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