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남편이 몸살감기로 끙끙 앓길래 조용히 쉬라고 아이를 데리고 나왔다. 둘이서 뭘 할까 고민하다 동물원에 가보기로 의기투합했다. 동물원의 가을은 그야말로 절정이었다. 발이 닿을 때마다 사박사박 소리 나는 낙엽길을 따라 걸으며 홍학과 기린, 코뿔소, 하마, 미어캣, 코끼리 등 크고 작은 동물들을 만났다. 책이나 TV에서 많이 보던 동물들이라 아이에게 부쩍 친숙한 모양이었다. 일일이 손을 흔들며 아는 체를 했다. 아이는 동물도 사람처럼 친구를 만나면 반가워하고, 인사를 안 해주면 서운해할 거라고 여기는 듯했다.
그 마음, 어른이 돼가면서 사라진다. 점점 동물을 대하는 마음이 무덤덤해진다. 심지어 이익을 위해 동물을 이용하기도 한다. 사실 과학 발전 뒤에도 수많은 동물의 희생이 있었다. 1960년대 초만 해도 임신인지 아닌지를 알아보려면 토끼가 필요했다. 여성의 소변을 토끼 뱃속에 넣고 토끼 난소에 황체(배란 후 만들어지는 물질)가 생기는지를 확인해야 했다. 결국 토끼를 죽여 부검할 수밖에 없었다.
특정 화학물질이 생체에 독성을 일으키는지 알아보기 위해선 토끼나 기니피그, 생쥐 등 실험동물의 몸에 그 물질을 직접 주입했다. 토끼 각막에 화학물질을 넣거나 기니피그 피부에 화학물질을 발라 어떤 부작용이 생기는지 확인하는 식이다. 인체에 무해한 의약품이나 화장품을 만들기 위해 애꿎은 동물들이 고통을 감수해왔던 셈이다.
이 같은 무자비한 실험에 대해 1980년대부터 과학계에서 대안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살아 있는 동물 대신 죽은 동물의 조직이나 세포를 쓰고, 아예 동물이 필요 없는 실험용 인공조직을 개발하고, 포유류 같은 고등동물 대신 고통에 민감하지 않은 하등동물을 이용하는 식이다. 실제로 토끼 눈은 식용으로 도축한 소의 각막이나 부화시킨 유정란으로, 기니피그 피부는 사람 피부세포를 배양해 3차원 조직처럼 만든 인공피부로 대체됐다.
영국 과학자들이 1959년 제안한 '3R 원칙'도 널리 지지를 받게 됐다. 되도록 동물실험 말고 다른 방법을 쓰고(Replace), 필요한 실험동물의 수를 줄이고(Reduce), 실험동물의 고통을 최대한 완화하자(Refine)는 것이다. 생체의 구조나 기능을 본뜬 컴퓨터 프로그램이나 바이오센서도 등장했다. 동물 없이 동물실험을 하는 세상도 올지 모르겠다.
동물들에게 손을 흔드는 아이의 모습이 문득 친정에 있는 옛 사진첩 속의 내 모습과 겹쳤다. 사진 속의 어린 나 역시 엄마 아빠 손을 잡고 갔던 동물원에서 동물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었으니까. 아이를 따라 나도 "하마야, 안녕" 한 번 해봤다. 살짝 어색했다. 많이 줄었지만 실험을 위해 부득이하게 희생되는 동물이 여전히 적지 않다. 실험동물을 대하는 과학자라면 한번쯤 동심(童心)을 되돌아보길 바란다.
임소형기자 precar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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