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욘사마 신드롬'으로 시작한 일본의 한류는 이제 하나의 현상을 넘어 정착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한국 드라마가 TV에 그대로 방송되거나 한국 가수나 배우가 일본 드라마에 얼굴을 비치는 것이 이제는 놀랄 일이 아니다.
최근 후지TV의 드라마 '나와 스타의 99일'에 김태희가 여주인공으로 캐스팅돼 전파를 타고 있다. 일본 드라마에 한국 배우가 주연으로 출연하는 것은 처음이다. 일본의 대중문화 평론가들은 한류가 더 이상 독특한 현상이나 신드롬이 아니며 할리우드 영화처럼 일본인에게 익숙한 콘텐츠의 하나라고 평가한다.
대중문화 한류에서 음식 한류로
가수나 배우만 일본에 한류를 정착시킨 것은 아니다. 김치, 막걸리 등 음식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일본인의 입맛에 맞춰 단맛을 강조한 기무치(김치의 일본식 발음)가 인기를 얻으면서 김치 종주국의 위상이 흔들리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제 한류가 퍼지면서 한국식 김치를 맛보려는 일본인이 늘고 있고, 대형 유통업체가 한국과 직거래를 통해 김치를 판매하는 일도 많아졌다.
최근에는 비빔밥의 약진이 두드러진다. 고추장을 양념으로 사용하는 비빔밥은 매운 맛 때문에 꺼리는 경향이 있었으나 최근에는 바로 그 매운 맛을 즐기려는 일본인이 늘고 있다. 이에 맞춰 유명 도시락 전문 프랜차이즈 매장이 한국의 비빔밥을 정식 메뉴로 소개하기도 했다. 돌솥비빔밥에 심취한 일부 마니아가 직접 비빔밥을 해먹겠다며 돌솥을 구입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지난 달 초 도쿄(東京) 빅사이트에서 열린 세계여행박람회에서도 비빔밥의 진가가 확인됐다. 100여개국의 관광청, 항공사 등이 참가한 이 행사에서 가장 인기를 끈 곳은 단연 한국관이었는데 특히 대한항공이 기내식으로 제공하는 비빔밥 무료 시식회에는 주최 측이 마련한 시식권 500장이 10분도 안돼 동이 났다.
도호쿠(東北) 대지진의 화마가 할퀴고 지나간 센다이(仙台)시 시민회관에서 지난 주말 비빔밥을 주제로 한 넌버블 퍼포먼스 '비밥' 공연이 있었다. 동서남북과 중앙 등 다섯 방위를 뜻하는 오방색(파랑, 하양, 빨강, 검정, 노랑) 재료를 섞어 조화로운 맛을 만드는 비빔밥의 의미를 비트박스, 아카펠라, 비보잉 등을 통해 표현한 이 작품은 한식의 세계화를 알리는 대표 공연이기도 하다. 한일우정의 밤 행사의 하나로 진행된 이 공연에는 센다이 시민 1,000여명이 초대돼 박수와 함성으로 화답했다. 공연 마지막에 무대로 초청된 일본인 관객은 여러 재료로 만든 비빔밥 중 한국식 정통 비빔밥을 정확히 가려냈다. 2부 행사로 진행된 한국요리 시식회에서 센다이 시민들은 비빔밥, 구절판, 백김치, 궁중 떡볶이 등을 맛보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외형과 내실을 함께 갖춘 비빔밥
언젠가 일본의 한 언론인이 한국의 비빔밥을 두고 겉보기에는 훌륭하지만 내실은 그렇지 못하다며 양두구육(羊頭狗肉)이라고 했다가 큰 비판을 받은 적이 있다. 그 언론인이 훗날 자신도 비빔밥을 좋아한다며 한발 물러서기는 했지만, 이 일은 한국인이 비빔밥에 얼마나 애착을 갖는지를 그가 알게 된 계기가 됐다.
일본의 비빔밥 한류를 보면서, 비빔밥이야말로 외형과 내실을 고루 갖춘 음식이라고 목청 높였던 한국인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음을 새삼 느꼈다.
한창만 도쿄특파원 cmha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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