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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서산 천수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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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서산 천수만

입력
2011.11.02 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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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쉿" 여기는 철새들의 나라 새들의 법을 따르세요

거리를 줄여 보려는 수작이다. 대부분의 여행은. 자연과 인간의 거리, 풍경과 내면의 거리. 좀체 좁혀지지 않는 거리에 난처해하는 짓이 여행이다. 겨울 철새를 보러 떠나는 여행길에서는, 하지만 애써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새와 사람의 거리, 생명과 문명의 거리, 서늘한 무위와 꺼지지 않는 욕망 사이의 거리. 11월. 사람 손 타지 않는 전국의 습지에 북국의 새가 찾아왔다. 고요하게, 행선(行禪)의 걸음으로 그 거리를 느껴보러 떠난다.

서산 천수만은 본래 바닷사람의 터전이다. 새벽부터 동력선에 그물을 감고 개펄에 호미 날을 박는 풍경은 그러나 대규모 간척이 마무리된 1980년대 이후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국토 확장과 식량 자급을 목표로 내세운 무지막지한 토목공사는 누만년 밀물과 썰물이 반복된 땅을 3,100만평에 이르는 농경지로 바꿔놓았다. 헤아릴 수 없는 바다생명과 갯생명이 평토장 당했다. 그러나 죽음의 공사는 새로운 생명을 이곳에 깃들게 하는 계기도 됐다. 10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천수만 일대는 겨울 철새의 보금자리가 된다.

"조용히 하고 먼저 귀로 들어봐요. 내가 처음 이 소리에 매료됐다니까."

정수리 위를 덮치는 가창오리떼의 새카만 비행에 탄성을 지르자 천수만습지연구센터 한종현씨가 황급히 '쉿' 하는 손가락을 입에다 갖다 댔다. 가창오리가 떼지어 나는 모습은 영화 '미이라'에 나오는, 모래 폭풍으로 이뤄진 거대한 초자연체의 형상을 떠올리게 했다. 수천의 날개가 동시에 방향을 꺾게 만드는 척추동물의 비밀이 무엇인지 짐작할 길이 없다. 한씨는 그런 시각의 미망보다 청각의 풍요를 권했다. 성대가 없는 사슴의 울음 같은 소리가, 하늘을 나는 수천의 생명체에서 발산돼 하늘을 덮고 있었다.

현재 큰기러기, 쇠기러기, 노랑부리저어새 등 10여만 마리가 천수만 일대에서 겨울을 나고 있다. 기러기가 떠나면 청둥오리, 고방오리 등이 찾아온다. 올 겨울 100여종, 총 30여만 마리가 천수만을 거쳐갈 것으로 보인다. "절정이 되려면 아직 멀었다"고 설명하는 한씨의 목소리는 먹이터인 논에서 잠자리인 간월호로 이동하는 기러기떼의 날갯짓 소리에 파묻혔다. 그러나 천수만의 철새는 10여년 전 300여종, 100여만 마리가 찾을 때에 비하면 종과 개체수가 크게 줄었다. 여기엔 복합적인 이유가 있다.

간척지의 주인은 현대그룹이었다. 2002년 그룹이 유동성 위기에 처하면서 이 땅은 잘게 쪼개져 팔려나갔다. 기업농 시절 6~10%에 달하던 낙곡률(추수 이후 바닥에 떨어지는 낟알의 비율)은 소규모 경작을 하는 현재 2%도 되지 않는다. 게다가 볏단마저 축산용으로 묶어 팔면서 새들이 먹을 것이 급격히 줄었다. 간척지에 드나드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새들의 서식 환경도 나빠졌다. 농어촌공사는 비포장 흙길인 간척지 농로를 포장, 안면도까지 직선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닦으려 하고 있다.

"탐조 여행은 40배율로 세상을 바라보는 일입니다. 남의 집 안마당을 들여다보듯 조심스럽게 자연을 대하는 것이지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유지해야 할 거리가 있듯이 사람과 자연 사이에도 반드시 지켜야 하는 거리가 있어요. 이곳마저 그것이 무너지고 있어서 안타깝네요."

천수만 철새 여행에서 절정의 순간은, 해 진 뒤 논에서 먹이를 찾던 새들이 간월호와 부남호로 떼지어 돌아오는 순간이다. 군생하는 새들은 습격하듯 거침없이 난다. 저마다의 울음으로, 저마다의 생의 원리를 따라 층층의 노을을 까맣게 수놓는다. 새들이 깃든 호수는 저문 뒤에도 한참 동안 부산했다. 20여년 전 '개척단'의 이름으로 개흙을 뒤엎어 새의 보금자리를 만든 인간의 손이 다시 그 보금자리를 부수려 하고 있었다. 두 행위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 오히려 난감했다.

서산=글·사진 유상호기자 shy@hk.co.kr

■ 서산 도비산 부석사

새를 좇아 드넓은 천수만 간척지를 헤매다 길을 잃었을 때, 길을 찾는 기준이 되는 것은 현대그룹 시절 쓰던 거대한 정미 창고와 도비산(358m)이다. 이 도비산 자락에 1,300년 전 창건된 부석사가 있다. 천수만 철새 여행에 베이스캠프가 되는 사찰이다.

주지 주경 스님과의 차담. 스님은 옛이야기 한 자락을 들려줬다.

"매한테 쫓기던 비둘기가 수행자의 품으로 숨어들었습니다. 수행자가 왜 약한 생명을 해치려 드냐고 매를 꾸짖었습니다. 매는 '비둘기를 먹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고 항변했습니다. 수행자는 비둘기 대신 자기 살을 떼어 주겠다고 허벅지 살을 베어내 저울에 비둘기와 함께 달았습니다. 그런데 저울이 비둘기쪽으로 기울었어요. 다리 하나를 잘라 다시 얹어도 역시 비둘기가 더 무거웠습니다. 마침내 수행자가 저울 위에 올라서자 수평을 이뤘습니다."

새에 대한 고민이 곧 인간에 대한 화두라고 스님은 얘기했다. 부석사는 요사채 한 칸을 천수만습지연구센터에 내주고 탐조용 망원경과 카메라 등을 사서 템플스테이에 참가한 사람들이 철새를 접할 기회를 주고 있다. 2003년 시작된 철새 템플스테이는 재작년과 작년 두 해를 쉴 수밖에 없었다. 조류 인플루엔자에 구제역까지 겹쳤기 때문이다. 부석사는 11월부터 내년 1월까지 프로그램을 다시 진행한다.

철새를 보러 떠난 길이 아니더라도, 부석사는 한 번쯤 부러 찾아갈 만큼 예쁜 절집이다. 이름과 창건 설화까지 같은 경북 영주의 부석사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고즈넉한 분위기만은 뒤지지 않는다. 대웅전 앞마당에서 굽어보는 서산과 태안의 누긋한 지세가 누구나 꼽는 이 절의 첫째 매력이다.

서산=글·사진 유상호기자 shy@hk.co.kr

■ 여행수첩/ 서산 천수만

●서해안고속도로 서산IC, 해미IC를 나와 서산읍에 닿은 뒤 '서산 AㆍB지구 간척지' 방향 이정표를 따라 649번 지방도를 타고 가면 나온다. 처음 가는 외지인이 길을 찾기는 어렵다. 서산시에서 운영하는 서산버드랜드에 길을 묻는 것이 좋다. 5일부터 12월 31일까지 A지구 일원에서 단체 탐조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041)660-3024.

●부석사 템플스테이는 홈페이지(www.busuksa.com)에서 신청할 수 있다. 탐조 프로그램은 내년 1월까지 신청자에 한해 따로 운영한다. 문의 부석사 종무소 (041)662-3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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