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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숨 다섯번째 장편 '노란 개를 버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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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숨 다섯번째 장편 '노란 개를 버리러'

입력
2011.10.31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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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 베케트의 사진이 집 거실에 걸려 있다는 소설가 김숨(37)씨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모든 책을 버려야 하는 상황에서 두 손에 책 한 권씩만 남겨둔다면. "<고도를 기다리며> 와 <성경> 을 택하겠다."

최근 그가 펴낸 다섯번째 장편 <노란 개를 버리러> (문학동네 발행)는 바로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를 떠올리게 하는 소설이다.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가 뚜렷한 이유도 목적도 없이 고도(Godot)라는 정체 모를 인물을 기다리며 부조리한 대화를 나누듯, 이 소설의 주인공인 아버지와 소년은 뚜렷한 이유도 없이 택시 트렁크에 있다는 노란 개를 버리러 길을 떠난다. 놀랍지만 장편 소설의 이야기 골격이 사실 이게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392쪽 분량의 긴 장편을 메운단 말인가.

택시를 몰며 '노란 개를 버리러' 가는 부자의 여정에 돌발적으로 때로 느릿하게 끼어 들어 방해하는 것은 그로테스크한 이미지와 풍경들, 기이한 에피소드, 그리고 소년의 파편화된 기억들이다. 단무지를 많이 먹어 노랗게 변한 엄마의 혀, 얼굴이 텅 빈 여자, 커튼 뒤의 남자, 굳은 시멘트덩이 같은 달, 감자떡 만큼 흐린 유리, 언 조기처럼 차가운 손, 짓무른 시금치 빛깔의 바다 등 불안하고 불길한 기억과 이미지들이 소설 전편에 출몰해 발광(發光)한다.

이 불가해한 여정에서 아버지와 소년이 나누는 대화 역시도 목표물 없는 화살 마냥 끊임없이 엇나가기는 마찬가지.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꼭 버려야 하는 거예요?/ 어차피 버려진 개였다./ 아빠가 그렇지 않느냐는 눈빛으로 소년을 쳐다봤다./처음부터 말이다./ 처음부터요?/ 처음부터/ 처음이 언젠데요?/ 처음 말이다. 처음/ 그러니까 처음이 언제냔 말이에요?/ 처음부터…/ 처음이 도대체 언제부터인지 알지 못했으나, 아빠가 노란 개를 데리고 온 날을 소년은 또렷이 기억했다."(53~54쪽) 이 부조리극을 지배하는 정서는 일상을 느닷없이 침범하는 원인 모를 불안이다.

1997년 등단한 이후 세 권의 소설집과 네 권의 장편소설을 내며 독특한 스타일을 구축해온 김숨의 세계가 발산시킨 것이 스산한 이미지 속에 드리운 삶의 불안이었다. "일상 생활 속에서 불안이나 공포를 많이 느낀다"는 작가가 삶을 지각하는 방식이 그의 작품 세계와 다르지 않다. "화사한 여성의 얼굴보다 허전한 그의 뒷머리에서 텅 빈 어떤 것을 봐요. 명품 가방을 든 젊은 여성들보다 허리 굽은 할머니가 먼저 눈에 들어오고. 집 근처 호수를 거닐다 보면, 물 위를 노니는 평화로운 오리떼보다는 풀 속에서 죽은 듯 정지해 있는 외톨이 오리가 더 마음에 와 닿고…." 그가 기승전결의 전통적 서사 문법을 버릴 수밖에 없는 것도 삶의 기저에 놓인 유령 같은 그림자를 누구보다 예민하게 감각하기 때문일 터. 삶이란 것이 애당초 의도한 각본대로 짜여지지 않고, 원인과 결과가 모호한 경우가 태반이 아닌가. 작가를 '잠수함 속 토끼'에 비유할 수 있다면, 요즘 같은 대중적 불안의 시대를 그는 미리 앓아왔는지도 모른다.

이 베케트적 부조리극이 난해하게 다가온다면 책장을 덮으면 될 일. 하지만 인과율의 겉옷을 벗긴, 생의 원초적 리듬에 몸을 맡길 수 있다면 소설은 의외로 술술 읽힌다. 반복되면서도 묘하게 변주되는 그의 문장을 느낌대로 따라가면 이상한 유머와 매혹이 찾아온다. 이런 구절처럼. "사람들이 어디로 갔는데요?/ 택시에 두고 내린 심장을 찾으러 갔지./ 아빠가 소년을 쳐다 보고 웃었다. 웃을 때 아빠의 눈동자는 압정으로 꽂아놓은 듯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심장을요?/ 택시에 두고 내린 갈비뼈를 찾으러 갔지./ 갈비뼈를요?/ 택시에 두고 내린 간을 찾으러 갔지./ 간을요?/ 택시에 두고 내린 얼굴을 찾으러 갔지."(108쪽)

이걸 한편의 시(詩)라 불러도 좋을 것 같다. 등단 초기 "소설의 형식을 빌려 시가 되는 소설을 쓰고 싶었다"던 그는 그런 의식적인 노력은 버렸다고 하지만, 그의 소설은 이제 자연스레 시처럼 되었다. 그것도 장편소설로서.

송용창기자 hermee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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