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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월화극 '천일의 약속' 인기몰이/ 송곳같은 대사 생생한 캐릭터…뻔한 멜로물인데 뻔하질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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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월화극 '천일의 약속' 인기몰이/ 송곳같은 대사 생생한 캐릭터…뻔한 멜로물인데 뻔하질 않다

입력
2011.10.31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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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가 사고로 죽고 여섯 살 때 엄마마저 집을 나간 후, 고모네 얹혀 자란 여자는 한번도 자신의 욕망대로 살 수 없었다. 자신의 글을 쓰고 싶지만 낮에는 출판사 팀장으로 밤에는 대필작가로 생계를 꾸려야 했고, 오래 마음에 품은 사랑마저 잠시 '도둑질'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자존심 하나로 버텨온 그 여자에게 허락된 건 딱 그의 결혼 전까지. 1년 간의 짧은 행복, 실연의 아픔을 추스리기도 전에 알츠하이머라는 청천벽력이 찾아온다.

SBS '천일의 약속'은 근래 보기 드문 진지한 멜로 드라마다. 남녀상열지사를 비틀고 뒤집어 슬픔 속에서도 웃음을 끌어내고야 마는 요즘 드라마들 속에서 '천일의 약속'은 다시 기본을 얘기한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과 불치병이라는 신파의 요소를 두루 갖췄지만 관록의 김수현 작가는 농밀한 대사로, 삶을 관조하는 통찰로 뻔한 스토리를 뻔하지 않게 풀어내고 있다. 지난달 17일 첫 전파를 탄지 2주. 가을 여심을 흔들며 벌써 시청률 20%를 눈 앞에 두고 있다.

송곳 대사와 공감 100% 캐릭터

지형(김래원)과 서연(수애)은 첫 회에서 헤어진다. 중간중간 회상 장면을 넣으며 둘이 얼마나 절절하게 사랑했는지를 단 한 차례 방송으로 모두 설명한다. 시청자의 가슴을 한방에 무너트리는 노작가의 필력 덕이다. "연기하면서 매 순간 (대본에)감탄한다"는 수애의 말이 실감나는 지점이다.

서연을 사랑하면서도 오래 전 정혼한 사이인 약혼녀와 파혼하지 못하는 지형은 비겁하지만 안쓰럽다. 결혼 준비로 끌려 다니는 지형의 무표정과 약혼녀 향기(정유미)의 해바라기 사랑 모두 아린 아픔을 머금고 있다. 딸에게 무심한 예비사위에게 한바탕 퍼붓는 향기 엄마(이미숙)의 송곳 같은 대사나, 억지로 결혼하는 아들이 안쓰러우면서도 마음 못 잡을까 전전긍긍하는 지형 엄마(김해숙)의 캐릭터도 생생하다. 어느 인물의 감정선 하나도 대충 뭉뚱그리지 않는다. 역시나 김수현의 브라운관 장악력이 돋보인다.

수애의 물오른 연기가 생생함 더해

구차해지는 게 죽기보다 싫어서, 사랑하는 남자를 곤란하게 할 수 없어서 붙들지 않는, '가진 건 자존심밖에 없는' 서연은 김수현 드라마에서 익히 본 인물이다. '사랑과 야망'(2006), '내 남자의 여자'(2007), '엄마가 뿔났다'(2008), '인생은 아름다워'(2010)에도 주체적인 여성이 중심에 있었지만 특히 이번 드라마는 서연에 대한 감정 몰입도가 높다.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고 혼란스러워하는 서연의 내적 갈등은 수애의 물오른 연기로 두드러진다. 서연의 억눌린 고통이 기억을 잃어가는 비극으로 옮겨가면 수애의 연기는 '청춘의 덫'(1999)의 심은하나 '불꽃'(2000)의 이영애에 비견될 전망이다.

수애는 "(이 드라마를 통해)배우로서 보람과 희열, 좌절을 맛보고 성장기를 겪는 것 같다"며 "나도 몰랐던 부분을 꺼내 연기하며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있다"고 밝혔다.

막장도, 쪽대본도 없는 안정된 촬영

'천일의 약속'의 촬영 진도는 10회 안팎. 대본은 14회까지 나왔다. 쪽대본이라는 한국드라마의 풍토병도 김수현 드라마에는 없다. 김영섭 CP는 "(대본이 여유 있게 나와)배우들이 좀 더 연기를 고민하고 촬영 역시 정성을 다하게 된다"고 말했다.

우연히 주인공들이 만난다는 작위적인 설정이 없는 점도 이 드라마의 강점이다. 오히려 지난주 방영된 4회에서 김 작가는 서연의 출판사 동료들이 점심 먹으며 수다 떠는 장면을 통해 최근 드라마들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과부 아지매 길길이 뛰어 연 매출 얼마, 성공 사례까지는 그래 긍정의 메시지로 봐준다고. 그런데 거기다가 군침 넘어가게 잘생긴 재벌 외아들까지 엮어 줘야겠냐고… 연하 재벌 상속남이 돌았냐? (중략) 판타지를 빙자한 사기라니까…." 이 대사가 시청자들에게 설득력 있게 다가오는 것은 작가 스스로 자신의 작품을 그만큼 철저하게 대하기 때문일 듯하다.

채지은기자 cje@hk.co.kr

강기정 인턴기자(경희대 국문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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