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상 인쇄공이나 다름 없던 충무로 밑바닥 생활을 견디고, 세계적 영화사 루카스필름의 선임 아티스트로 발탁된 인물이 있다. 바로 루카스필름애니메이션의 시니어아티스트 도세민(45)씨. 그는 지금 루카스필름의 TV 애니메이션 시리즈 '스타워즈 크론 워'의 캐릭터 제작을 맡고 있다. 경기디자인진흥원과 CG랜드에서 28일 주최한 컴퓨터그래픽세미나에 강사로 초청 받은 그를 만났다.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한 도 씨의 꿈은 화가였다. 그런데 미대 진학을 준비하던 고 3이었던 1984년 부친의 사업 실패로 졸지에 가장이 됐다. 생계를 책임져야 할 장남이었던 도 씨는 꿈을 접고 대신 충무로 인쇄골목에 뛰어들었다. 그나마 광고업체들이 모여 있어서 그림을 그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도 씨는 1년 동안 소위 '먹작업'만 했다. 디자이너들이 광고 시안을 해놓으면 그 위에 까맣게 먹선을 입히는 일이다. 그는 "꼬박 6개월은 인쇄소를 뛰어다니며 온갖 심부름을 하는 등 인쇄공같은 일을 했고, 1년이 될 때까지 양 손이 새까맣도록 먹칠만 했다"고 회고했다.
그런 그에게 광고업체에서 우연히 본 컴퓨터는 신세계였다. 컴퓨터그래픽(CG)이란 용어조차 몰랐던 시절, 그는 컴퓨터로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유학을 결심했다. 그의 재주를 알아본 광고회사가 선뜻 유학비를 지원할 테니 다녀와서 같이 일하자는 제안을 했다.
꿈에 부풀었던 시절도 잠시, 1993년 일본 도쿄에 도착하고 나서 후원 회사가 문을 닫았다. 다시 짐을 싸야 할 판이었지만 도 씨는 하다못해 일본어라도 배우자는 독한 마음을 먹고 일본에 눌러 앉았다. 그는 "잃을게 없으니 용기가 생겼다"고 말했다. 신문배달, 빌딩 청소, 가전제품 수리 보조 등 하루에 3가지 아르바이트를 하며 일본어 학원을 다녔다.
그렇게 번 돈으로 도쿄에서 가장 유명하고 유일한 CG 학교였던 일본전자전문학교와 무사시노 미대에서 공부했다. 전액 장학금을 받고 다닐 정도로 남다른 재능을 보인 그는 바로 일본 최초의 CG제작사인 시로부미에 입사했다. 그곳에서 CG를 이용해 TV 광고 작업을 하던 그는 일본 유명 게임업체인 스퀘어의 눈에 띄어 전세계적으로 화제가 된 영화 '파이널 판타지'작업에 참여했다. 파이널 판타지는 비록 흥행에 실패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작업을 CG로 했고, 배우조차 실물처럼 만든 CG 캐릭터들이 연기를 해서 화제가 됐다.
이후 '춤추는 대수사선'등 일본 영화에 CG 담당으로 참여하던 그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소니의 가정용 게임기 '플레이스테이션(PS)2'용으로 나온 대작 게임 '갓 오브 워'. 그리스 신화를 배경으로 신들의 싸움을 다룬 이 게임의 영화 같은 동영상은 도 씨와 한국계 미국회사 세모로직이 1년 동안 공들인 작품이었다.
이 게임 덕분에 도 씨는 11년의 일본 생활을 접고 캐나다의 툰박스애니메이션으로 옮겼고, 다시 올해 1월 영화 '스타워즈'를 만든 조지 루카스 감독이 세운 미국 루카스필름에서 같이 일하자는 제안을 받았다. 그는 "루카스필름은 CG를 하는 사람들에게 꿈의 직장"이라며 "이직 제안을 받았을 때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기뻤다"고 소감을 밝혔다.
도 씨는 루카스필름에서 애니메이션을 전담하는 자회사인 싱가포르의 루카스필름애니메이션에서 '스타워즈 크론 워'의 각종 등장인물들을 3차원 CG로 만드는 일을 한다. 그는 현재 미국 TV에서 시즌4를 방영할 만큼 인기인 이 작품의 시즌5를 제작하고 있다. 드물게도 영화, 광고, 게임 등 각 분야를 두루 섭렵하며 익힌 그의 기술은 루카스필름에서도 가장 중요한 캐릭터 제작을 맡길 만큼 인정을 받는다.
도 씨의 꿈은 직접 기획, 감독, 제작한 CG 영화를 만드는 것. 그는 "일본 지브리 스튜디오의 애니메이션처럼 손그림 느낌이 나는 따스한 작품을 만들고 싶다"며 "93년 이후 외국 생활만 해서 한국이 너무 그립다"고 말했다. 그는 CG 전문가를 꿈꾸는 후배들을 위해 "요즘은 새로운 CG 소프트웨어가 쏟아지는 만큼 끊임없이 공부하고 많은 작품을 보라"고 조언했다.
최연진기자 wolfpack@hk.co.kr
신상순기자 ssshi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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