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1월 10일 오전 10시 서울 중구 쌍림동 CJ제일제당 본사에 공정거래위원회 조사관 4명이 들이닥쳤다. 이 회사의 밀가루 관련 가격담합 혐의를 포착한 공정위가 현장조사에 나선 것. 정문 안내데스크 직원의 연락을 받은 김모 과장은 '밀가루 가격 변경안' '월간 미팅자료' 등 중요 문서가 저장된 외장하드를 황급히 챙겨 들고 비상계단으로 내달렸다. 조사관들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무실에 도착할 때쯤 김 과장은 외장하드를 1층 화단 깊숙이 숨기는 데 성공했다.
부당한 가격인상으로 소비자들에게 큰 피해를 입히는 기업들의 담합을 단속하는 공정위가 업체들의 현장조사 방해, 담합 모의자들의 잡아떼기와 진술 뒤집기 등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통상적으로 담합 조사는 정황을 포착해 기초자료를 수집하는 1단계, 현장조사로 관련 자료를 확보하는 2단계, 업체들로부터 수집한 자료들을 퍼즐 조각처럼 맞춰 '담합' 그림을 만드는 3단계, 관계자들의 시인을 받아내는 4단계 작업으로 이뤄진다. 그런데 2단계와 4단계가 쉽지 않아 조사기간이 3, 4년을 넘기기 일쑤다.
일단 현장조사부터 만만찮다. 기초자료 수집 단계에서 해당 업체들이 낌새를 채기 때문. 이럴 때는 몇 달이고 기다려야 한다. 업체들이 긴장을 늦출 때를 기다려 맹수가 사냥하듯 숨죽여 조심조심 다가가 순식간에 증거를 낚아채야 한다. 현장조사 20년 경력의 김오식(54) 서기관은 "보안을 위해 조사관들에게도 조사 직전까지 몇 시에 어디로 가는지 알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현장에서도 걸림돌은 많다. 회사 정문을 지키는 용역업체 직원은 1차로 뚫어야 할 관문. '경제검찰'이라고 불리는 공정위지만 압수수색 권한이 없기 때문에 때로는 당찬 여성 조사관들의 육탄 돌격이 해법이 되기도 한다. 또 '공정위'라는 말만 나오면 중요한 서류를 감춰버리는 통에 신속한 작업이 필수다. 김 서기관은 "현장조사는 5분 안에 성패가 갈린다"고 말했다.
현장조사에 성공해도 이후 작업도 순탄치 않다. 증거자료를 들이대도 '모른다'고 잡아 떼거나 조사 초반에는 가격 담합 사실을 시인하다가 이후 말을 바꾸는 일도 부지기수. 2008년 6월 시작한 농심, 삼양식품, 오뚜기, 한국야쿠르트 등 라면 4개사 가격담합 조사가 3년 넘게 표류하는 것도 이런 이유다. 공정위 관계자는 "증거자료가 아직 빈약하고 업체 관계자들이 말을 바꾸는 통에 조사가 진척되지 않고 있다"면서 "얼마나 더 걸릴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담합사건 처리기간을 줄이기 위해 공정위는 자진신고자 감면(리니언시) 제도에 기대를 걸고 있다. 담합 주도업체라도 가장 먼저 자진신고를 하면 과징금 전액을 면제해 주기 때문에 지나친 면죄부라는 비난이 있지만 이 제도가 아니면 조사 자체가 진행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게 공정위의 입장이다. 송상민 카르텔총괄과장은 "은밀한 구두 약속으로 이뤄지는 담합의 증거를 확보하기가 쉽지 않다"면서 "이 제도는 결정적인 증거 확보에 필수적일 뿐만 아니라 담합 업체들간 신의를 무너뜨려 재담합을 억제하는 효과도 크다"고 설명했다.
허정헌기자 xscop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