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9월 28일 오전. 한 초등학생이 강원 춘천시 우두동의 논둑에서 주검으로 발견됐다. 부검 결과 사망한 아이는 성폭행을 당한 후 살해된 것으로 밝혀졌다. 아이의 아버지는 당시 춘천경찰서 역전파출소장이었다.
'춘천 파출소장 딸 강간살인사건'이라 불린 사건의 파장은 상당했다. 행정안전부장관(당시 내무부장관)은 이 사건을 전국 4대 강력사건으로 규정하고, 10월 10일까지 범인을 검거하라고 지시했다. 검거에 실패할 경우 문책하겠다는 '시한부 검거령'이었다.
춘천경찰서 소속 경찰관들은 즉각 30여명의 용의자를 소환했다. 일부 용의자에 대해서는 즉결심판으로 구류 처분을 받아, 구금을 한 채 수사를 하는 '무리수'를 두기도 했다. 그 가운데는 당시 만화가게를 운영하던 정원섭(당시 38세)씨가 있었다.
정씨는 사체가 발견된 다음날인 9월 29일 연행됐다. 경찰은 정씨가 술집 여종업원과 윤락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즉결심판에 회부했다. 정씨를 5일간 구금하고, 강도 높은 조사를 벌였다. 하지만 경찰은 정씨에게서 혐의점을 찾지 못했다. 그 사이 장관이 통보한 검거시한은 점점 가까워졌다.
경찰은 10월 7일 정씨를 다시 연행해 조사하기 시작했다. 범인검거시한을 하루 앞둔 10월 9일, 정씨는 자신이 범인이라고 자백했다. 경찰은 정씨 자백과, 살해현장에서 발견된 연필과 빗이 정씨의 것이라는 주변 인물들의 진술 등을 근거로 정씨를 강간치사 및 살인 혐의로 기소했다. 법원은 정씨에 대한 혐의를 모두 인정,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정씨는 그 후 1987년 모범수로 출소할 때까지 15년간 교도소 생활을 해야 했다.
석방된 후 정씨는 뒤늦게나마 무죄를 호소했다. 1999년 법원에 재심을 신청했지만, 기각 당하기도 했다. 진실은 2007년이 돼서야 드러나기 시작했다. 진실ㆍ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경찰이 기한에 쫓겨 사건을 조작했다고 결론을 내렸고, 법원은 위원회의 재심 권고를 받아들였다. 일반 형사사건에 대한 재심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1, 2심 재판부는 "당시 경찰조사에서 상당한 정도의 폭행ㆍ협박 내지 가혹행위가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돼 수사기관의 증거는 증거 능력이 없거나 증명력이 부족하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대법원 1부(주심 안대희 대법관)는 27일 정씨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정씨에게 살인범의 낙인이 찍힌 지 39년만이었다.
남상욱기자 thot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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