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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작, 그곳] 김소진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의 터전 '미아리 산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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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작, 그곳] 김소진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의 터전 '미아리 산동네'

입력
2011.10.26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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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루한 군상들의 기억마저 갈아엎고…지금 여기를 낙원이라 할 수 있을까

소설가 김소진(1963~1997)의 요절은 우리 문학의 아물지 않은 내상(內傷)이다. 한 명의 뛰어난 리얼리스트가 서른 넷의 짧은 생을 마감한 데 대한 안타까움 때문만은 아니다. 그의 때이른 죽음은 사회 중심에서 배제된 '밥풀때기', 요즘식이라면 프레카리아트(precariatㆍ고용이 불안정한 노동자)라고 불릴 주변부 삶과의 내밀한 문학적 터널의 상실이었다. 시난고난한 삶에서도 흐벅진 활력을 잃지 않은 밑바닥 인생과 그네들의 육덕진 언어의 충실한 서기관이었던 김소진의 죽음은 유구하게 내려왔던 어떤 문학적 장(場)의 붕괴에 가까웠다.

1980년대적 민중 이념과 결별한 문학이 '욕망 발산'과 '자아 찾기'란 딱지를 쥐고 뉴타운을 건설하는 사이, 김소진 문학의 젖줄이었던 '미아리 산동네'도 초현대식 고층 아파트가 빼곡한 뉴타운으로 싹쓸이 탈바꿈했다. 그러나 그곳에서 떠밀린 주변부 삶이 갈수록 팍팍해져 위기로 치닫고 있는 오늘의 상황이기에, 뉴타운 바깥을 외로이 걸었던 그의 부재가 더욱 아쉽고 뼈아프다.

뉴타운으로 변모한 미아리 산동네

문단에서 김소진과 가장 절친했던 대학 친구이자 동료였던 정홍수 강 출판사 대표를 만난 것은 지난 24일. 그의 안내로 김소진이 자란 곳이며 그 문학의 출발점이자 귀향점이었던 서울 성북구 길음동 일대를 찾았다. 예전 산동네 초입이었던 길음시장 쪽으로 들어서자 그도 어리둥절하긴 마찬가지. 대학시절 정 대표도 이 근처에 산 적이 있었다지만 5년여 만에 찾은 동네는 더욱 낯설어졌다. '이곳에 과연 산이 있었던 걸까' 싶게 말쑥하게 정비된 평지의 도로 사이로 솟은 초고층 아파트들이 위압적이었다. 거대한 빈민 군락지였던 산동네는 1990년대 후반부터 단계적으로 재개발돼, 세련된 조경과 상가가 어울린 도심 안의 자족한 신도시로 일신했다.

미아리 고개를 넘어서 구불구불한 길음시장 골목을 지나 언덕을 오르면 레고블록 같은 판자집들이 다닥다닥 엉겨 붙어있던 곳. 행정구역상 1970년대 길음동으로 바뀌긴 했지만, 통칭 '미아리 산동네'로 불렸던 곳이다. 그러나 천지개벽한 마을의 외형처럼 그 이름도 새로 입주해온 주민이나 상인들에겐 기억 속에서 지워진 사어(死語)가 된 듯했다. 뉴타운의 연혁을 묻기 위해 들른 부동산 업소 관계자는 "미아동은 저 건너편 딴 곳인데…"라며 '미아리 산동네'란 말에 의아한 표정이었다.

철원에서 장사를 하던 김소진의 부모가 이곳에 흘러 들어온 것은 그가 네 살 때였다. 이후 장성해 결혼하기 전까지 머물렀던 이곳은 그의 기억의 자궁이었다. 1997년 초 발표된 그의 마지막 작품 '눈 사람 속의 검은 항아리'는 의미심장하게도 재개발 논의가 한창이던 이곳을 다시 찾는 과정을 다룬 단편이다. "여태껏 나를 지탱해왔던 기억, 그 기억을 지탱해온 육체인 이 산동네가 사라진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중략) 이 동네가 포클레인의 날카로운 삽질에 깎여가면 내 허약한 기억도 송두리째 퍼내어질 것이다"는 구절이 마치 암시였던 듯, 그 해 4월 그의 육신은 땅에 묻혔다. 3월 초 암 진단을 받은 지 한달 보름만의 급작스런 타계였다.

시대를 거슬러 주변부의 비루한 삶으로

김소진은 첫 소설집 (1993)을 시작으로 네 권의 소설집, 두 권의 장편소설과 산문집 등을 냈다. 그의 작품 활동 기간은 냉전 시대가 해체되던 1991년부터 외환위기가 터지기 직전이었던 1997년까지 7년. 80년대를 풍미했던 해방적 이념 담론은 쇠퇴하고 문민정부의 개막과 함께 민주주의의 진전, 대중소비문화의 폭발 등으로 새로운 고속도로를 질주하던 시대였다.

80년대 후일담류의 회한 한편으로 신세대 문학인들이 80년대적 문법을 청산하고 영상과 인터넷이란 낯선 영토에서 자아의 내면과 개성에 몰두하던 그 때, 김소진은 역주행이다시피 한 길을 외로이 나섰다. 삶의 형상을 거리를 두고 조명하는 리얼리즘의 현미경이 고장 났다고 여겨졌지만, 그는 그 남루한 현미경을 들고 80년대 들어 노동자 민중의 범주에서도 버려졌던 날품팔이, 부랑아, 알코올중독자, 도박꾼 등 비루한 인생들에 다가갔다. 보수-진보 담론이나 새로운 문학 예술의 자장에서도 배제된,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들을 자신의 문학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첫 소설집의 표제작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은 그 역주행의 신호탄 같은 단편이었다. 그가 '쥐잡기'로 등단한 해이기도 한 1991년은 시위 도중 사망한 강경대와 김귀정으로 인해 학생운동이 마지막 불꽃을 피우던 때. 김귀정의 시신이 안치된 백병원에 시위대가 모여 정권과 맞서던 상황을 담은 '열리 사회…'의 갈등 축은 민주화운동세력과 정권이 아니라, 시민대책위와 밥풀때기 간이다. 프레스 기계에 손이 잘려 외팔이가 됐거나 날품팔이 인력시장을 전전하는 밥풀때기들이 억하심정을 풀고자 시위대에 합류했지만, 너저분하고 버릇없는 행동으로 인해 "당신들 밥풀때기들 때문에 민주화 시위가 일반 시민들한테 얼마나 욕을 먹는 줄이나 아쇼? 당신들 도대체 누구, 아니 어느 기관의 조종을 받고 이런 망나니짓을 하는 거요?"라며 되레 대책위측으로부터 '적'으로 멸시를 받는다. 민주주의의 규칙을 들먹이는 대책위 관계자들의 교과서적 훈시와 밥풀때기들의 울분에 찬 밑바닥 언어가 대립하는 이 작품은 민주주의의 형식화 혹은 관료화가 오히려 억압적 틀이 될 수 있음을 예리하게 감지한 셈이었다. 단편 '지하생활자'에서 서울역 지하도에 모인 노숙자, 행려병자, 앉은뱅이들이 제복을 입은 청원경찰의 고압적 태도를 비웃는 장면 역시 비슷한 맥락이다. 문학평론가 김형중씨는 "비루하기 그지 없는 존재들이 말의 난장으로 행정권력을 무화시키는 이 카니발적 장면은 우리 문학사에서 두고두고 거론해 마땅한 장면"이라며 김소진의 작품세계를 '비루한 것들의 리얼리즘'이라 불렀다.

이 비루한 존재들의 난장은 연작소설 등 후속작들에서 더욱 꽃을 피우는데, 그의 유년시절 기억 속에 웅크렸던 미아리 산동네의 이웃들을 끌어온 것이었다. 상머슴 출신의 날품팔이, 전직 공사판 십장, 놀라운 괴력을 소유했지만 지능이 떨어지는 육손이, 똥지게꾼, 월남전 출신의 얼금뱅이, 딸에게 얹혀사는 폐병쟁이, 직업 없이 빈둥거리는 양아치…. 70년대 산동네 모였던 이들의 고단한 삶과 그 속에서 분출하는 원초적 욕망의 난장을, 특히 신세대 문학에서 거의 사장되다시피 한 우리말과 걸진 밑바닥 언어로 되살린 것은 김소진 문학의 값진 성취였다.

이미 등단작에서부터 무르익은 우리말 솜씨를 보였던 그가 방위 시절 을 씹어 먹어가며 공부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다. 정 대표는 "어머니의 걸쭉한 입담에서 영향을 받은데다 김소진의 의식적인 노력도 컸다"며 "대학노트에 촘촘히 정리한 그만의 우리말사전도 만들어놓았을 정도다"고 말했다.

아비는 개흘레꾼이었다

김소진이 주변부 인생에 공감할 수 있었던 것은 어린 시절 동네 형이나 이웃 어른들이 바로 그런 이들이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아버지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존재였기 때문이다. 우리 문학사에서 길이 기억될, 그의 명제는 '아비는 개흘레꾼이었다'다. "나의 아비는 숙명의 종도, 그리고 권력투쟁에서 패배한 남로당이었다고 외칠만한 위치에 있지도 못했기에 나는 또 다른 가슴앓이를 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다시 '아비는 군바리였다'거나 '아비는 악덕자본가였다'라고 외칠 처지는 더욱 아닌 데 나의 절망은 깃들여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아비는 테제도 그렇다고 안티테제도 아니었다."('개흘레꾼' 중)

존경의 대상도 그렇다고 반항이나 극복의 대상도 아닌 무기력한 아비는 개 흘레 붙여주는 일을 보람차게 수행하는 사람일 뿐이었다. '아비의 권위에 반발한 탕자의 귀환'이라는 로망스는 그에겐 애시당초 없었던 셈이다. 아버지의 권위 자체가 없는 빈민의 아들이 밟는 과정은 이념이나 종교 등에서 관념적 아버지상을 설정해 싸우다 스스로 권위자가 되는 식이지만, 김소진은 문학을 통해 아버지의 삶을 이해하고 종내 자신의 정체성으로 포용했다.

비루한 삶의 생명력을 전면적으로 부각하기 전인 초기작 '쥐잡기' '고아떤 뺑덕어멈' '춘하 돌아오다' 등은 바로 그 아비에 대한 부정과 포용의 기나긴 싸움이었다. '앞에 총'도 할 줄 모르면서 6ㆍ25 전쟁터에 떠밀려 나왔다 전쟁포로가 된 아버지는 북에 처자식을 남겨두고 남쪽을 택한 후 평생 북쪽 가족에 대한 부채의식과 그리움에 시달리는 생활력 제로의 남자. 살림은 억척스런 어머니의 몫이었다. 아버지를 증오하고 수치스러워하던 아들은 아버지의 역사를 이해하면서 연민과 동정으로 발전해간다. '고아떤 뺑덕어멈'에서 북에 둔 처와 닮은 약장수단 뺑덕어멈에게 애틋한 감정을 느낀 아버지를 위해 과외로 번 돈으로 뺑덕어멈에게 화대까지 챙겨주는 모진 과정을 거치면서. 문학평론가 류보선씨는 "아버지의 삶에 대한 재발견은 도시 주변부 산동네의 삶을 전혀 다른 각도에서 보게 하는 중요한 계기였다"며 "아버지의 삶에 깃들인 카니발적 활력을 발견하여, 그 활력을 아버지가 속한 산동네라는 공동체로 전이시켜 확장시킨 것"이라고 평가했다.

고아떤 리얼리스트

김소진이 아버지의 삶에서 발견하는 것은, '맹탕 헛것'('쥐잡기' 중)일지도 모르지만 북쪽 가족에 대한 부채의식으로 평생 무력했던 아버지의 순박한 마음이 아니었을까. 남편과 아들을 싸잡아 '이 씨를 말릴 함경도 종자들아'라고 악다구니를 퍼부어대던 어머니가 부친의 사망 후 "능력이 없어 처자식 고생은 꽤나 시킨 양반이었지만, 맴씨만 갖고 따진다면야 아주 맑고 고운 양반"이라고 회상하는 것처럼.

큰 뿔테 안경을 쓰고 웃고 있는 김소진의 사진에선 그 아버지의 마음을 이어 받은 듯한 순박함이 진하게 배어 있다. 정 대표는 "그렇게 착한 친구가 없었다"며 "어려운 집안에서 자랐지만 구김살이 없었고, 늘 다른 사람들을 배려했다"고 말했다. "문학강연 요청이 종종 있었는데, 강연료가 적고 먼 곳에서 요청이 오더라도 그런 것 따지지 않고 다녔죠. 문학 합네 하면서 작가로서의 권위를 내세우지도 않았고. 부인에게 용돈 받아서 꼭 그만큼 생활했고 사치도 전혀 몰랐고 성실했어요. 그런 자세를 보고 있으면 그저 좋았습니다.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미소가 참 선하지 않아요?"

이 순수함 또한 '헛것'일지 모르지만 이념이 지나가도 남는 어떤 것이다. 의 또 다른 단편들 '그리운 동방' '처용단장' '혁명기념일' 등은 80년대 운동권 학생이 이념과 현실 사이에서 고민하는 이야기들이다. '좋은 세상은 더 이상 불가능할지 모른다'는 비극적 판단에서도 주인공들은 자존심에서건 허영에서건 힘겹게 어떤 지조를 지키려 애쓴다. 대세를 따라 실리를 챙겨도 누구 하나 욕할 것 없는 세상이 되었건만.

대체 '미아리 산동네'를 통해서 당신이 가고자 했던 곳은 어디인가 묻는다면 그는 아마도 이런 대답을 할 것 같다. "모르지 맹탕 헛것이 눈에 보였는지두."('쥐잡기' 중)

송용창기자 hermeet@hk.co.kr

■ 문인들이 기억하는 김소진

문인들이 기억하는 김소진은 '조용하면서 쑥스러운 웃음을 짓던 사람'이다.

서울대 인문대 영문학과를 졸업한 후 한겨레신문 교열부 기자로 5년 정도 근무한 김소진은 1995년 직장을 그만두고 정홍수 대표가 운영하던 강 출판사에 집필실을 얻어 전업작가 생활을 했다. 당시 어울렸던 문인은 정 대표를 비롯해 대학 동기였던 문학평론가 진정석씨와 시인 안찬수, 그리고 비슷한 시기 전업작가로 나선 소설가 성석제씨였다. 강 출판사에 자주 들렀다는 성씨는 김소진에 대해 "말을 아끼는 조용한 사람이었는데, 단정하면서 생각이 많아 보이는 모습이 옛날 선비 같았다"며 "눈이 참 맑아서 맑은 사람이라는 느낌이 가졌다"고 말했다. 그는 "소설은 자기가 다루는 대상에 대해 끝까지 파고드는 집요함을 보여 소설가는 소설가구나 싶었다"고 했다.

문학사상사에 근무할 당시 출판사로 찾아온 김소진을 종종 봤다는 소설가 구효서씨는 "출판사에 와서는 말이 별로 없었고 늘 쑥스러운 웃음만 지었다"며 "글을 통해서야 그의 내면을 알 수 있는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최근 윤동주의 삶을 다룬 <동주> 을 펴낸 구씨는 "윤동주가 머뭇거리고 망설이던 인물이었는데, 내가 보기엔 김소진은 두세 배는 더 심했을 것 같다"고 덧붙였다. 구씨는 "386 세대였지만 그의 소설은 386적인 것과 달랐는데, 월남 가족이었던 자신의 가족사를 통해서 해방 이후 면면히 내려온 어떤 흐름을 본 것이 아니었나 싶다"고 말했다.

그를 아끼던 문인들은 2007년 김소진의 10주기를 맞아 그를 추억하는 <소진의 기억> 이란 문집을 내기도 했다. 문집엔 생전의 그를 만난 적은 없지만 그의 문학을 추억하는 후배 문인의 글도 담겨 있다. 소설가 천운영씨는 "대학시절 쓴 첫 습작품이 '쥐덫'이었는데, 김소진의 '쥐잡기'가 있는 걸 뒤늦게 알게 된 후 그를 미워하고 시기하면서도 그를 좋아하게 됐다"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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