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의 크리스마스'와 '봄날은 간다'의 허진호 감독은 상하이에서 한창 영화를 촬영 중이다. 제목은 '위험한 관계'. 한국에서 배용준 전도연 주연의 '스캔들'로 만들어지기도 했던 쇼데를로 드 라클로의 18세기 프랑스 동명소설을 밑그림 삼았다. 중국어권 스타 장쯔이(章子怡)와 장동건 주연의 이 영화는 싱가포르 영화사도 참여하지만 사실상 중국영화다.
'달콤한 인생'과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을 만든 김지운 감독은 이달 미국에서 할리우드 진출작 '라스트 스탠드'의 촬영에 들어갔다. 작은 마을의 나이든 보안관을 전면에 내세운 현대식 서부극으로 아놀드 슈와제네거 전 캘리포니아 주지사의 스크린 복귀작이다.
충무로의 글로벌화가 본격 진행되면서 국내 중견 감독들이 속속 중국과 할리우드로 향하고 있다. 한국인의 혼이 깃든 메이드 인 차이나, 메이드 인 할리우드 영화들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각 감독들의 이력이 전환기를 맞은 것과 더불어 한국영화도 새로운 시대에 접어 들었다는 평가가 따른다.
곽재용 감독과 박찬욱 감독도 각각 중국과 할리우드에서 영화 작업 중이다. '엽기적인 그녀'의 곽 감독은 11월 촬영에 들어갈 '양귀비' 연출 준비에 여념이 없고, 박 감독은 8월 크랭크인 한 '스토커'를 미국 내쉬빌에서 촬영하고 있다.
'양귀비'는 중국 스타인 판빙빙(范冰冰)과 왕리홍(王力宏)이 주연을 맡은 대작이다. 제작비는 180억원으로 중국의 2개 영화사가 중추 역할을 하고 있다. 인기 TV시리즈 '프리즌 브레이크'의 스타 웬트워스 밀러 각본의 '스토커'는 니콜 키드먼, 미아 와시코우스카 등이 출연한다. 아버지를 잃은 소녀와 그녀 앞에 갑자기 나타난 삼촌의 이야기를 다룬다. 박 감독의 첫 할리우드 연출작이다.
봉준호 감독은 한국 프랑스 미국 등이 참여한 다국적 영화 '설국열차'의 촬영을 위해 지난 13일 체코 프라하로 떠났다. '설국열차'는 핵전쟁 이후 열차에 의존해 살아가는 인간 군상의 모습을 그린 영화로 제작비는 400억원 가량이다.
할리우드는 세계 영화의 중심지. 여러 작품을 통해 국제적 인지도를 쌓은 박찬욱 감독과 김지운 감독의 할리우드 진출은 자연스러운 행보로 보인다. 반면 곽재용 감독과 허진호 감독의 중국영화 연출은 좀 의외다. 중국 영화시장이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이면서 두 감독의 대륙 진출이 가능해졌다. 지난해 중국 영화시장 규모는 101억7,200만 위안으로 2009년(62억600만 위안)보다 63.9% 늘었다. 급속히 팽창하는 시장의 성장 속도에 발맞추려 한국영화 인력을 적극 수혈하고 있는 것이다.
중견 감독들의 해외 진출을 바라보는 충무로의 시선은 기대 반, 우려 반이다. 한국영화의 해외 시장 개척의 첨병 역할을 할 수도 있지만, 충무로엔 별 이익을 주지 못하는 단순 인력 수출에 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충무로는 한계에 다다른 영화시장 돌파구로 글로벌화를 꼽고 있다. 감독과 배우들의 해외 진출을 글로벌화의 1단계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하지만 우위썬(吳宇森)과 쉬커(徐克) 등 홍콩 감독들이 1990년대 후반부터 바통을 이으며 할리우드를 찾았지만 홍콩영화 진흥엔 큰 기여를 하지 못했다. 나카다 히데오(中田秀夫) 등 일본 공포영화 감독들도 2000년대 초반 미국 시장을 두드렸지만 일본 시장에 끼친 영향은 그리 크지 않다.
영화평론가 오동진씨는 "감독들만의 해외 진출은 제작과 자본의 결합이 아니니 산업에 연쇄적인 영향을 바로 끼치기 어렵다. 해외 진출에 따른 긍정적인 효과가 얼마나 빨리 나타날 수 있냐가 결국 중요하다"고 말했다.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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