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고통스러운 국가 폭력과 차별은 제주에서부터 시작된 건 아니었을까요. 제주를 찾아 4ㆍ3 학살 흔적과 펜스가 처진 강정마을 해군기지 터를 보는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23일 서울 남산 옛 국가안전기획부 터 앞. 한국의 대표적 인권운동가 중 한 명인 박래군 인권재단 '사람' 상임이사는 인권센터 건립 후원금 모금을 위한 15일간의 천리길 일정을 마무리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소회를 밝혔다.
14박15일, 2,800km가 넘는 여정을 통해 박 이사는 "곳곳에 있는 인권 관련 문제는 개별적인 게 아니라 모두 연결돼 있다"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했다.
여정의 시작은 제주였다. 박 이사와 재단 활동가인 최현모씨, 사진 찍는 이선일씨, 1인 미디어 활동가 민노씨 등 네 사람은 지난 10일 제주 4ㆍ3 평화공원 방문을 시작으로 도보와 차량을 이용해 인권 행보를 이어갔다.
박 이사는 4ㆍ3항쟁의 비극을 증언하는 다랑쉬굴과 변뱅생 모녀상 앞에서 큰 슬픔을 느꼈다고 토로했다. 박 이사는 "학살 현장인 다랑쉬굴로 피신해 들어간 사람들이 그 와중에도 한 사람이 들어갈 만한 공간에 솥단지를 걸어 놓은 것을 보니 삶에 대한 의지가 느껴졌다"며 "동굴에 널려 있던 유골의 참혹함보다 그들이 살아가려 했던 이유를 회고하니 견디기가 더 힘들었다"고 더듬었다.
제주를 떠나며 박 이사는 "뭔가 묵직한 것을 안고 가는 것 같기도 하고, 묵직한 것을 두고 오는 것 같기도 했다"며 "인권의 현장은 늘 이런 역사의 무게 위에 있다"고 말했다.
그는 제주를 시작으로 광주 5ㆍ18묘역과 고흥 소록도 한센병 집단 거주지, 부산 영도 한진중공업 농성 현장, 평택 쌍용자동차 농성장, 용산 참사 현장 등 우리 사회 인권의 실상을 보여주는 최전선을 골라 찾았다.
천리길 8일째가 되던 16일 박 이사는 부산 한진중공업 농성장으로 20년 인연의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을 만나러 갔다. 박 이사는 "김진숙과 그의 동지들이 많은 것을 해냈지만 교섭이 끝나고 실질적인 정리해고가 철회돼야 그들이 땅으로 내려올 것이고 비로소 문제 해결의 가닥이 잡힐 것"이라고 강조했다. 13일차인 22일 용산참사 현장을 찾았던 박 이사는 "일부 세입자들에게 일부의 보상만 이뤄졌을 뿐 책임자 처벌이나 정부의 사과는 없었다"며 "뉴타운 개발사업에 대한 각성과 비판이 자리하는 등 사회에 새로운 문제의식을 남겼지만 근본적 해결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천리길 여정은 이날 오후 2시 옛 안기부 터를 걷는 것으로 끝났다. 마지막 행사에 동참한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과거 고문과 탄압, 인권 유린의 상징적 현장이었던 이곳에 인권센터가 들어서서 인권의 소중함을 깨닫는 현장으로 변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박 이사는 "인권을 보장 받지 못하고 고통을 겪는 전국의 현장을 직접 찾아 막연하게만 느껴지는 우리 사회의 인권 문제를 드러내보자는 취지로 천리를 걸었다"며 "인권의 소중함을 느끼고 아는 사람들을 엮어 내기라도 할 수 있는 공간이 하나 없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지적했다. 박 이사는 오는 12월 인권센터 착공 계획 발표를 목표로 10억원의 후원금을 모금하고 있다.
권영은기자 you@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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