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을 놓지 않으려던 독재자의 말로는 늘 비참했다. 히틀러는 자살을 선택했고 무솔리니는 총살을 당했으며 후세인은 교수대에 올랐다. 밀로셰비치처럼 옥사한 독재자도 있고 마르코스처럼 망명지에서 쓸쓸한 죽음을 맞은 경우도 있다.
무아마르 카다피의 최후는 어떻게 기록되어야 할까. 체포와 압송 과정이 동영상 등을 통해 공개됐지만 사망 경위를 둘러싼 증언이 엇갈려 카다피가 어떤 모습으로 최후를 맞았는지는 여전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 사망 전모가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42년간 리비아를 호령했던 카다피의 유해가 사망 하루 만인 21일(현지시간) 알려지지 않은 장소에 신속히 매장된다.
외신 보도를 종합해 20일 상황을 재구성하면, 이날 오전 카다피에게 첫 공격을 시작한 쪽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군이었다. 카다피의 고향 시르테가 완전 함락되기 직전, 카다피가 15대 정도의 차량 행렬을 이끌고 시르테를 탈출하고 있다는 첩보가 확인됐다. 프랑스는 즉각 미라주 전투기를 출격해 폭격을 가했고 차량이 시르테 외곽에 멈추자 시민군이 가세해 카다피 호위부대를 공격했다.
카다피는 추적을 피해 인근 하수관으로 숨어들었고, 이내 시민군 병사에게 발각돼 생포되기에 이른다. 당시 카다피는 다리 등에 부상을 입었지만 생명에 지장을 받을 치명상은 아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시민군 병사들이 카다피를 압송하는 장면을 촬영한 휴대폰 동영상을 봐도 카다피는 멍한 표정으로 축 늘어져 있었으나 가끔 고개를 끄덕이는 등 스스로 몸을 움직일 수는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그 다음부터 얘기가 엇갈린다. 잠시 후 상황을 촬영한 동영상에는 병사들이 이미 숨을 거둔 듯한 카다피를 질질 끌고 가는 장면과 그의 시신 주위에 모여 환호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공백기간에 어떤 일이 벌어진 걸까. 일단은 병사들이 무방비 상태인 카다피에게 우발적으로 총을 쏘아 죽였을 가능성이 있다. 동영상을 보면 "쏘지 마"라는 얘기가 흘러나온 다음 총성이 울리고 카메라 방향이 흔들리는 장면이 있는데 이 때 압송 중이던 병사가 카다피를 사살했다는 것이다.
사살된 게 아니라 몰매를 맞고 죽었다는 증언도 있다. 과도국가위원회(NTC) 내부 소식통은 "병사들이 카다피를 압송하는 과정에서 그를 심하게 구타했고 결국에는 죽여버렸다"고 로이터통신에 전했다. 알자지라 등은 카다피 호위병이 가슴에 총을 쏘았다는 목격자의 증언을 전했다. 일각에서는 NATO나 NTC 측이 카다피가 살아 있을 경우 발생할 후폭풍을 고려해 의도적으로 살해했을 가능성도 제기하지만 NTC는 "사살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고 의혹을 부인했다.
NTC 측이 발표한 사망 경위는 또 다르다. 마무드 지브릴 총리는 "압송 과정에서 갑자기 시민군과 카다피군 사이에 치열한 교전이 발생했고 이 과정에서 카다피가 머리에 총을 맞고 숨졌다"고 말했다. 추가 조사와 시신 부검이 필요한 상황이지만 지브릴 총리는 "부검의사도 양쪽 군 중 어느 쪽에서 쏜 총에 맞았는지를 밝히지 못했다"고 말했다.
로이터통신은 NTC가 신속한 절차를 거쳐 21일 중 카다피의 시신을 매장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이슬람권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간단한 절차를 거쳐 24시간 안에 매장하는 것이 원칙인데 카다피의 경우 묘소가 추종세력 성지가 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매장 장소는 공개되지 않을 전망이다.
이영창기자 anti092@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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