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 시대를 연 애플 '아이폰'이 국내에 선보인 건 2009년 11월. 출시 불과 열흘 만에 10만대가 팔리는 등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후 한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빨리, 가장 많이 아이폰을 판매한 나라'가 됐다. 하지만 한국 IT대중의 우상으로 떠오른 아이폰의 애프터서비스(AS)는 낙제점이었다. 출시 직후부터 소비자들의 불만이 끊이지 않았다. 지난해 스마트폰 기기 전체 상담건수(491건)의 62.5%(307건)를 점할 정도였다. 급기야 2010년 국정감사에서 애플 본사의 패럴 하우디 AS 총책임자가 증인으로 소환됐다. 하지만 애플은 "한국 법규를 준수하고 있으며, 아이폰 AS 정책은 전세계적으로 동일하기 때문에 바꿀 생각이 없다"고 버텼다.
결국 지난해 11월 '경제검찰'로 불리는 공정거래위원회가 칼을 빼 들었고, 공무원 생활을 시작한 지 1년밖에 되지 않은 박민영(25) 사무관에게 사건이 배당됐다. 햇병아리 공무원에게 'IT공룡' 애플은 벅찬 상대였다. 그는 "당시엔 무엇부터 해야 할 지 막막하기만 했다"고 토로했다. 박 사무관은 먼저 아이폰 피해자들이 결성한 서너 곳의 인터넷카페에 가입해 피해사례를 끌어 모았다. 밤낮도 주말도 없었다. 애플 마크만 봐도 신물이 나서 즐겨 먹던 사과까지 끊을 정도였다.
애플코리아 실무자와 '왜 새 제품으로 교환해주지 않는지'를 놓고 수십 차례 설전을 벌였다. 으름장도 놓고 읍소도 해봤지만 요지부동이었다. 올해 1월엔 애플 일본ㆍ아시아본부 애드리엔 바넥 대외협력부장을 만나 애플 AS 정책의 문제점을 입술이 부르트도록 설명했건만, "서비스 증진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원론적인 답변만 돌아왔다.
대화와 설득으론 부지하세월일 수밖에 없었다. 박 사무관은 입을 앙다물었다. 소비자들의 불만 글을 읽는 것만으론 2%가 부족했다. 아깝지만 구입한 지 몇 개월 안 된 아이폰을 고장내기로 했다. 버튼을 세게 눌러댔고, 물에 담그면 소비자 과실이 될까 두려워 입김을 불어넣었다. 이렇게 2, 3주간 아이폰을 괴롭힌 끝에 드디어 고장이 나자, 서울 강남의 서비스센터로 달려갔다.
원인이야 어찌됐든 명백한 기계 결함인데도, 수리비 부담 여부 등을 직원이 주관적으로 판단했다. 과실 여부를 소비자가 직접 설명해야 하는 것도 문제였다. 공정위 약관심사 자문위원인 법률 전문가들을 불러 모았다. 이들과의 토론을 통해 애플 약관이 약관규제법상 '소비자에게 부당하게 불리한 조항'에 해당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때부터 애플과의 지루한 법리 공방이 시작됐다. 하루에도 여러 차례 애플에 전화해 관련 자료를 요구했다. 이메일도 수십 번 오갔다. "한국에서 스마트폰을 판매하는 삼성, LG, 모토로라 등과 달리 애플만 기존 약관을 고집하는 것은 한국 소비자들의 기대에 어긋난다"는 설득도 병행했다. 결국 애플은 8월 "공정위의 조정에 따르겠다"며 백기를 들었다.
세계적인 IT기업 애플이 세계에서 처음으로 한국 공정당국에 무릎을 꿇은 것이다. 이후 애플은 아이폰 자체 결함이 있어도 리퍼폰(중고 부품으로 재조립한 제품)으로만 교환해주던 정책을 바꿔 구입 한 달까지 새 제품으로 교환해주고 있다.
박 사무관은 "어린 시절 육상으로 단련된 체력과 소비자들의 성원 덕에 힘든 싸움을 끝낼 수 있었다"며 "운 좋게 큰 사건을 맡아 좋은 경험을 쌓은 만큼 대기업의 불공정 행위를 막는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허정헌기자 xscop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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