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개월 간의 드라마였다. 당초 튀니지에서 점화돼 이집트에서 타오른 민주화의 불길이 리비아를 정조준하리라고 예상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42년 동안 국민을 옥죈 무아마르 카다피의 철권통치는 그만큼 강고했다. 리비아의 민주화 여정을 주요 장면을 통해 살펴본다.
2월 17일 혁명의 날 : 분노의 함성은 트리폴리에서 1,000㎞ 떨어진 리비아 제2의 도시 벵가지에서 터져 나왔다. 인권변호사 페티 타르벨의 석방을 요구하는 소수의 시위대에 수백명이 가세하면서 시위 구호가 '카다피 타도'로 돌변했다. 경찰의 강경진압 탓에 부상자가 속출했지만, 민주화 목소리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바람을 타고 동부 해안도시로 퍼져 나갔다.
2월 20일 시민군 벵가지 함락 : 교전 끝에 시민군은 벵가지를 점령했다. 카다피군은 시 외곽에서 미사일을 발사하며 탈환을 노렸으나 시민군의 사수의지는 굳건했다. 보름 후 시민군의 구심점인 과도국가위원회(NTC)가 출범하며 리비아 반정부 시위는 본격적인 내전에 돌입했다.
3월 10일 카다피 반격 개시: 시민군은 시르테까지 파죽지세로 내달렸다. 그러나 카다피는 중화기를 동원, 본격적인 반격에 나서 시민군을 코너로 몰았다.
3월 17일 유엔 리비아 결의안 채택 : 국제사회는 카다피군의 민간인 학살을 명분 삼아 리비아 상공에 비행금지구역(NFZ)을 설정하는 유엔 안보리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틀 뒤 프랑스 공군의 폭격을 신호탄으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군이 카다피 부대와 주요 보급로에 공습을 시작했다.
5월 15일 카다피군 미스라타서 철수 : NATO군의 지원 효과는 컸다. 카다피군은 동부 지역 대부분을 빼앗기고 트리폴리와 서부 산악지대만 수중에 넣었다. 카다피가 마지막까지 매달린 서부 미스라타의 장악 실패는 그의 몰락을 재촉하는 분기점이 됐다.
8월 23일 바브 알아지지야 함락 : 시민군이 마침내 수도 트리폴리의 요새 바브 알아지지야를 함락했다. 카다피의 행방이 묘연한 가운데 그의 아내 파르카시와 딸 아이샤, 아들 무하마드와 한니발은 일주일 뒤 알제리로 망명했고, 최정예 카미스여단을 이끌던 6남 카미스는 교전 중 사망했다.
10월 20일 내전 종식 : 시민군은 시르테에 화력을 집중했다. 지루한 공방전을 펼치며 포위망을 서서히 좁혀갔고, 카다피의 죽음과 함께 3만여명의 사상자를 낳은 리비아 내전은 마침표를 찍었다.
김이삭기자 hiri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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