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부터 중학교에서 쓸 역사 교과서의 집필 기준을 놓고 논란이 한창이다. '대한민국의 발전' 항목에서 종래의 '민주주의' 대신 '자유민주주의'의 발전 과정을 서술하라는 교육과학기술부의 지난 8월 고시 이후 촉발된 논쟁은 국사편찬위원회가 17일 '독재'라는 표현이 빠진 시안을 발표하자 더 격해졌다.
비판이 높자 국사편찬위원회 산하 집필기준개발 공동연구진은 '자유민주주의'를 '자유민주적 질서'로 바꾸고, '자유민주주의가 시련을 겪기도 했으나'라는 구절 앞에 '독재 정권 하에서'를 추가하는 수정안을 내놨지만, 논란을 가라앉힐 처방은 못 된다. '민주주의'라는 용어를 없애고'자유민주주의'를 내세운 교과부 고시의 큰 틀은 여전히 살아 있기 때문이다.
뉴라이트 계열에서는 "자유민주주의라는 표현에 문제가 있다면 북한식 인민민주주의도 괜찮다는 말이냐"고 반발하지만, 이는 역사를 좌우 양단으로 쪼개 반대편을 빨갱이로 모는 색깔론을 연상시킨다. 색깔론의 패악은 이미 질리도록 겪은 게 아니던가.
이번 시안이 나오기 전부터 우파는 현행 역사 교과서의 현대사 서술이 너무 자학적이라며 수정을 요구해왔다. 뉴라이트를 비롯해 국방부, 전국경제인연합, 한국기독교총연합이 저마다 자기 입맛에 맞는 새 교과서를 주문했다.
이승만을 건국의 아버지로 인정해야 한다는 뉴라이트의 주장은 최근 남산에 이승만 동상이 세워지고 KBS가 이승만을 다룬 3부작 다큐멘터리를 방영하는 성과를 거뒀다. 4ㆍ19 때 탑골공원의 이승만 동상이 쇠사슬에 묶인 채 종로 거리를 질질 끌려 다닌 것을 생각하면, 재평가를 빙자한 퇴행이다. 독재자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변명을 들어주기엔 양민 학살 등 그가 저지른 죄가 너무 크다. 또다른 독재자 박정희도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훈장처럼 달아주는 기이한 '너그러움'을 누리고 있다.
국방부와 전경련, 한기총은 고교 역사 교과서 수정을 요구했다. 국방부가 8월 교과부에 보낸 공문은 6ㆍ25 당시 국군과 미군의 민간인 학살, 5ㆍ18 민주화운동 진압군의 잔학성을 지나치게 부각하면서 북한에 대해서는 호의적으로 기술했다는 주장이 요지다. 국방부는 2008년에도 전두환 정권의 강압 통치를 '친북 좌파의 활동을 막기 위해 불가피한 조치였다'는 내용으로 바꿀 것을 요구했다. 전경련은 현행 교과서가 한국의 경제성장 과정과 대기업에 대해 부정적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며 불만을 나타냈고, 한기총은 기독교가 한국 근대화에 기여한 바를 반영해달라며 '기독교도' 대통령 이승만의 기념관 건립도 추진하겠다고 했다.
말 많고 탈 많은 새 역사 교과서는 헐레벌떡 만들게 생겼다. 새 집필 기준에 따른 교과서 제출 시한이 중학교는 내년 4월, 고등학교는 2013년 4월로 잡혀 있어 시간이 없다. '자유민주주의'를 강조한다는 빌미로 황당한 극우 교과서가 나올 가능성도 없지 않다.
역사 교과서 파동을 지켜보면서 미국인 저술가 제임스 로웬의 말이 떠올랐다.
"애국자를 배출하는 최선의 방책은 학생들에게 역사 교과서의 독단적 가르침에 도전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미국 역사 교과서의 역사 왜곡을 파헤쳐서 베스트셀러가 된 그의 책 에 나오는 구절이다.
새 역사 교과서의 집필 기준은 이달 말까지는 확정될 전망이다. 그 기준대로 쓴 교과서로 가르치고 배울 교사와 학생들을 위해 이렇게 말하고 싶다.
"역사 교과서를 의심할 자유를 허하라."
오미환 문화부 선임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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