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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불암의 플래시백] (5) "연기자는 작가의 펜 끝에 매달린 운명이지하지만 그 끝에서 영혼과 생명을 만들어내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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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불암의 플래시백] (5) "연기자는 작가의 펜 끝에 매달린 운명이지하지만 그 끝에서 영혼과 생명을 만들어내는 거야"

입력
2011.10.17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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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또 빼는 소리 하는 걸로 들릴지 모르지만 누가 물어보면 난 이렇게 대답해. “연기에 대해선 아는 게 없다, 할 말도 없다”고. 진심이야. 그래서 새삼 두렵지. 지금 후배들이 보고 있을 내 뒷모습을 생각하면 말야.

원로 연극 배우 중에 변기종 선생이라고 계셨어. 돌아가신 지 30년도 더 되신 분인데, 공연이 있는 날이면 누구보다 먼저 극장에 나오셨어. 텅 빈 무대에 올라 성호를 긋고 기도를 드리셨지. 언젠가 여쭤봤어. 무엇을 위해 기도를 드리냐고. “그저 내 자신을 잊게 해달라는 주문이지.” 선생의 대답은 그랬어. 끝없는 수련과 날카로운 분석을 통해 ‘자기’라는 옷을 벗어버리고 맡은 배역의 인물을 구현해야 한다는 뜻이셨을 거야. 그분 말씀을 이렇게 옮기기도 면구스럽구먼. 난 아직도 그걸 못 하고 있거든. 50년이 됐는데도.

재미없는 소리 한다고 타박하지 말고 한번 들어봐. 알베르 카뮈 얘기야. 어느 날 기자들이 카뮈한테 그렇게 물었대. “당신은 왜 실존철학을 하냐?” 카뮈의 대답이야. “난 실존이 뭔지 모른다. 머릿속에서 굴러가는 대로 썼을 뿐이다.” 질문이 돌아왔어. “그럼 당신에게 작가의 의미는 뭐냐?” “나는 작가의 무슨 의미 같은 것도 싫다. 사실 나는 배우가 되고 싶었는데 조건이 안 돼서 글쓰기를 시작한 거다.” 기자들이 웃고 난리가 났지. “얼굴도 얽고 키도 작달만한 사람이 무슨 배우냐”면서.

카뮈가 진지하게 대답했지. “작가는 스케치만 하는 사람일 뿐이다. 연출은 각 장르의 예술적 소재를 접합해 그 스케치가 뭘 묘사한 건지 그림을 만들어내는 역할이다. 그런데 배우는 그 그림에서 생명체로 튀어나오는 존재다. 애초 작가가 스케치하고 연출자가 만들어 낸 틀은 고양이 같을지라도, 거기에 호랑이의 생명을 불어넣는 것은 배우다. 그래서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것은 연기다.” 배우라면 연기에 임할 때 그 정도의 치열함과 경건함이 있어야 한다고 봐.

그런데 요즘엔 대본도 직접 안 외우는 애송이들이 많더구먼. 메이크업 받으면서 매니저들한테 자기 대사를 읽게 만들고. 그런 허깨비들은 오래 가지 못할 거야. 난 요즘도 분장을 직접 해. 내가 표현해야 하는 캐릭터를 직접 얼굴에 그려보는 거지. 분장 끝내면 거울을 1, 2분 정도 뚫어지게 바라봐. 최면을 거는 거야. ‘너, 최불암은 거기에 그대로 쉬고 있어라. 이제 거울 앞을 떠나는 건 최불암이 아니라 내가 맡은 역할의 인간이다. 촬영이 끝나면 다시 만나자.’ 무당이 접신했을 때랑 비슷한 거지. 난 그렇게 배웠고, 그게 옳다고 생각해.

내가 이 조건(외모)으로도 성장했던 게 그런 태도 덕일 거야. 1969년 이진순 선생이 연출한 연극 ‘이순신’에 출연했을 때야. 주인공이 되고 싶었지만 내 역할은 율포만호였지. 소대장급 정도 되려나. 이순신 역할은 오지명한테 돌아갔어. 시트콤 자주 나온 친구 알지? 질투 났지. 어쩌겠어, 열심히 하는 수밖에. 그때 갑옷은 양철조각 같은 비늘을 하나하나 엮어서 만든 거였는데 연습 한 번 하고 나면 듬성듬성 떨어져 나가곤 했어. 난 그걸 다 주워다 내 의상에 달았어. 나중엔 주인공보다 옷이 더 번쩍이는 거야. 수군거리길래 내가 그랬지. “소대장이 사단장보다 옷을 못 입어야 한다는 고증이라도 있느냐”고.

목소리를 굵직하게 내려고 밥도 하루 다섯 끼씩 먹었던 것 같아. 요컨대 연기만큼은 누구보다 적극적이었지. 그러다가, 내가 생각하기에 기회가 왔어. 대사가 잘 안 되는 친구가 있었어. 전승 보고를 하는 중요한 장면인데 말야. 그래서 내가 그 친구 데려다가 술을 마 시면서 얘기했지. “대사 좀 나누자.” 물론 펄쩍 뛰면서 말도 안 된다 그래. 연출자가 허락도 안 할 테고. 그래도 우겨서 그렇게 했어. 그 친구 대사를 다 외워서는, 실제 무대 위에서 그 친구가 해야 할 부분을 내가 해버린 거야. 정말 혼신을 다해서 했어.

엄청나게 혼났지. 그런데 꾸지람 끝에 이진순 선생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야. “근데 너 하기는 참 잘 하더라.” 다음날 신문에 리뷰가 났는데, 율포만호 역 배우의 연기가 돋보였다는 게 핵심이었어. 가슴이 벅차 오르더구먼. 그게 배우로서 내 이름, 당시엔 실명을 썼으니까, 최영한을 대중에게 처음 알린 계기가 된 것 같아.

이거 연기가 뭔지 모른다 그래 놓고 실컷 내 자랑만 늘어놓고 있는 것 같구먼. 주책 없이. 요컨대 난 요새 TV에 나오는 탤런트들이 연기에 대해 조금 더 진지해졌으면 하는 바람이야. 우리를 광대, 넓을 광(廣)자에 큰 대(大)자를 써서 부르는 이유를 고민했으면 좋겠어. 내게 단역을 부탁할 일이 있으면 연출자들이 몹시 어려워 해. 결례로 여기는 모양이지. 근데 전혀 그렇지 않아. 난 엑스트라 연기에도 연구가 필요하다고 믿어. 작품에 필요하다면, 단 1회의 출연이 아니라 몸의 일부만 촬영하는 일이라도 나는 언제나 오케이야.

옛날 얘기 하나만 더 할게. 김은국 원작 ‘순교자’ 민소령 역할을 맡은 적 있어. 60년에 세익스피어 페스티벌 하고 4, 5년 뒤니까… 64년 아니면 65년이었을 거야. 원작을 먼저 읽고 캐릭터 연구를 하는데 좀체 감이 잡히지 않았어. 이 인물이 전쟁에 회의를 가진 사람인데 도대체 관객에게 그 내면을 표현하는 방법을 모르겠더라고. 배우를 그만 해야 하나, 하고 고민도 했지. 그런데 하루는 집에 있는데 전기 검침원이 와서 눈금을 읽더니 “175키로 썼습니다” 하고 가는 거야. 그땐 상이군인이 검침원을 할 때야. 기록지를 한 장 찢어서 꽂아놓고는 절뚝거리면서 나가는데, 동작 하나하나에 전쟁의 아픔이 배어 있는 거야.

생각해봐. 나라를 위해 목숨 걸고 싸웠는데, 그거 하나 꽂으려고 불편한 몸을 이끌고 언덕배기를 오르는 신세가 된 거야. 그 흐릿한 눈빛, 회한에 젖은 표정, 그 뒷모습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기억했다가 무대 위에서 그대로 연기했지. 살도 빼고 허리에 손을 얹고 검침하는 그 동작을 표현했어. 연출 하시던 허규 선생이 무릎을 치시더구먼. 그거다, 하고. 끝내고 내려오는데 대선배이시던 장민호 선생과 나옥주, 백성희 선생이 분장실로 찾아왔어. “민소령 역할 한 최영한이가 누구냐?” 하고 찾으시더구먼.

영화? 영화도 적잖이 찍었지. 유현목, 김기영, 신상옥, 김수용 이런 감독들하고 다 해봤으니까. 좋은 작품들이었지. 근데 80년대 들어서 영화는 손을 놨어.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TV가 점점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커져가고 있었으니까, 이 바닥에서 한 번 의미를 찾아봐야겠다고. 영화에 비해서 예술성에서 낮게 대접받더라도 난 이쪽(TV)에 자꾸 눈이 가더구먼. TV가 정치, 철학, 경제, 문화 다 조종할 수 있는 도구라는 게 보였으니까.

그런데 최근 들어서 몇 년 동안 드라마를 거의 안 했어. 언제부턴가 그런 생각이 들었지. 내가 결국 작가가 써준 펜 끝에서 놀고 있구나, 연기라는 게 결국 내 자유 의지와는 상관 없는 행위구나 하고. 문득 그러기가 부질없어진 거야. 노인네가 배불러지더니 하는 소리라고 듣지 않았으면 좋겠어. 평생 해온 일에 대한 근원적 회의니까. 내가 연기해 온 숱한 인생 속에, 진짜 내 자리는 어딘지 궁금해졌달까… 하지만 결국 돌아왔어. 12월에 시작하는 드라마에 출연하기로 했잖아.

왜냐고? 내가 살아온 삶의 의미도 결국 연기를 통해서 확인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더군. 어쩌면 드라마를 통해, 사람들이 내게 좀 더 다른 차원의 ‘연기’를 원하고 있을지도 모르고. 그래, 하는 수밖에 없지. 시청자들에게 인간 최불암을 다시 보여주는 수밖에.

정리=유상호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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