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초구(47㎢)보다 조금 큰 61㎢ 넓이의 소국. 관광산업 외 특별한 수입은 없고, 상비군도 없어 국방을 이웃나라(이탈리아)에 의지하는 유럽의 작은 나라. 교차로 신호등도 없는 이 나라에는 전국민 3만명의 기대를 한 몸에 짊어진 축구 국가대표팀이 있다. 네덜란드나 독일과 맞붙은 A매치(국가대표팀 간 경기)에서 열 골 넘는 차로 농락당하기 일쑤지만, 대표팀의 축구에 대한 열정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바로 국제축구연맹(FIFA) 순위 꼴찌(203위)인 산마리노 국가대표팀이다. 10일 뉴욕타임스는 출전하는 국제무대마다 연전연패하는 현실을 이겨내고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유럽 축구 강대국에 겁 없이 도전장을 던지는 산마리노 대표팀의 사연을 소개했다.
월드컵이나 유럽챔피언십 본선에 한 차례도 출전한 적 없는 산마리노는 이번 유럽챔피언십(유로 2012) 예선에 어김없이 이름을 올렸다. E조에서 네덜란드(2위), 스웨덴(25위), 헝가리(27위), 핀란드(72위), 몰도바(122위) 등 한 번도 이겨보지 못한 나라들과 예선전을 치렀다. 예상대로 성적표는 참담했다. 열 경기에서 한 골도 넣지 못했고 53골을 내줬다. 그나마 만만한 상대인 몰도바에게도 2대 0, 4대 0으로 졌다.
산마리노 대표팀의 'A매치 수난사'를 돌아보면 유로 2012 예선 결과는 수모 축에도 못 낀다. 2006년 독일과의 경기에서 13대 0 패배를 당하는 등 국제경기에 첫 출전한 1990년 11월 이후 A매치에서 110전 1승 2무 107패를 기록했다. 총 472골을 내주고 17골을 넣었다. 1년에 평균 한 골도 못 넣은 셈이다. 2008년 이후로는 아예 A매치에서 골 맛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대표팀이 골을 넣는 날은 나라 전체가 축제 분위기로 들썩인다.
패배로 점철된 산마리노 축구사에도 영광의 순간이 있었다. 산마리노 사람들은 아직도 2004년 4월 리히텐슈타인과의 친선경기에서 1대 0으로 승리했던 순간을 잊지 못한다. 그 날이 처음이자 마지막 승리였다. 또 93년 잉글랜드전에서 산마리노 공격수 다비데 구알티에리에가 경기시작 8.3초만에 올린 득점은 월드컵 예선 사상 최단시간 골로 기록됐다.
그러나 열악한 축구 인프라 때문에 산마리노는 앞으로도 다른 유럽국가들의 들러리를 설 수 밖에 없을 전망이다. 선수층도 얇아 대표팀 선수 중 축구를 업으로 하는 프로선수는 세 명에 불과하다. 나머지 선수들은 직업을 따로 가진 아마추어다. 골키퍼는 은행원, 수비수는 운송회사를 운영하는 자영업자, 이런 식이다. 6일 스웨덴과의 홈경기를 앞두고 주전 골키퍼가 갑자기 부상을 입자 후보 골키퍼인 페데리코 발렌티니가 은행에서 일하다 말고 긴급호출을 받고 경기장으로 달려가기도 했다. 대표팀 감독마저 학교에서 물리를 가르치는 현직 교사다. 당연히 감독 월급은 없다.
기적이 아니면 승리가 불가능한 환경에서 매번 절망적 패배를 맛보는 산마리노 대표팀 선수들은 그러나 근성과 자부심만은 다른 일류 대표팀 못지않다. 나라 자체가 워낙 존재감이 없다 보니 축구 대표팀은 국제무대에 산마리노라는 나라를 널리 알릴 수 있는 유일한 자산이다. 14년째 대표팀을 이끌고 있는 지암파올로 마자 감독은 "소국인 산마리노에게 축구는 큰 나라들과의 빅매치에 동참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며 "축구 대표팀마저 없다면 사람들은 산마리노가 지중해 외딴 섬에나 있는 나라라 생각할 지 모른다"고 말했다. 조르지오 크레센티니 축구협회장은 "우리가 도전하는 목적은 작은 나라도 자존심이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것"이라고 의지를 다졌다.
산마리노 대표팀의 다음 도전은 내년 시작되는 브라질 월드컵 예선이다. 산마리노는 잉글랜드와 함께 H조에 배정됐다. 본선 진출 확률은 5,000분의 1. 브라질행이 언감생심이란 걸 산마리노 사람들은 잘 안다. 그러나 산마리노 국민은 18년 전처럼 '8.3초의 기적'이 재현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평범한 이웃들로 이뤄진 국가대표팀이 단 1초만이라도 축구 종가를 앞서가는 모습을 다시 한번 지켜보고 싶다는 소망이다.
이영창기자 anti092@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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